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이런 국내외 상황 속에서 대우실업주식회사(大宇實業株式會社)의 창업이 준동(蠢動)되고 있었다. 창업주는 30세의 약관 김우중(金宇中)이었다. 창업주 김우중은 1959년 9월,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4학년 무렵부터 부흥부 자문기관이었던 경제개발위원회에서 아르바이트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년 후인 60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8월까지 부흥부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서 경제와 정책을 체험했다.
그해 9월 창업주 김우중은 한성실업(漢城實業株式會社)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당시 무역업계에서 명망있는 수출입회사였다. 창업주는 이 회사에서 동남아무역을 담당했다.
1963년 한국최초로 한성실업은 동남아에 트리코트 원단을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역의 담당을 창업주 김우중이 맡았다. 한성의 트리코트 수출은 해마다 늘어갔고, 아울러 창업주의 안목과 실력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창업주는 대학시절부터 품어오던 향학에 대한 목마름으로 1966년 9월 한성실업을 퇴사했다. 그동안 심사숙고 하던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학을 준비하는 기간동안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바이어들을 만나야 했고 그들을 도와야했다.
그것은 바이어들이 이미 퇴사한 창업주를 찾아 도와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김우중이라야만 안심하고 트리코트를 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결국 옛정에 끌려 일을 해주었고, 이런 와중에서 그해 12월 창업주는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의 애초 목적은 견문을 넓힌다는 것이었으나, 동남아 시장을 둘러보고 상인들과 향후 시황을 검토하는 데 온전히 바쳐졌다. 이 여행에서 창업주는 처음으로 창업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의 살길이 수출밖에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67년 3월 22일, 창업주는 대우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사무실은 중구 명동의 동남도서빌딩 한모퉁이 20평이 미쳐 못되는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설립 자본금 500만원은 창업주 김우중과 동업자 도재환(都在煥)이 각각 2백5십만원 씩 출자한 것이었다. 창업직원은 창업주를 포함하여 5명이었다.
대우실업주식회사는 회사 설립 등기를 마친 며칠 후인 3월 29일, 무역업등록과 메리야스 수출조합에 가입하여 명실공히 무역회사로써의 자격을 갖추고 일을 시작하였다. 수출상품으로는 트리코트 지를 선택했다. 대우실업이 트리코트 지를 택한 이유는 창업주의 경험과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1963년 이후 트리코트 지는 국내를 중심으로 탄탄한 시장기반이 형성돼 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너도나도 달려들어 과당경쟁시대로 돌입되는 면도 보였다.
1963년 한국산 트리코트 직물 수출액은 7만 달러에 불과 했었다. 그러던 것이 1966년에는 280만 달러, 대우가 창업된 1967년에는 518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8년에는 1,279만 달러를 기록했다. 천만달러 선을 돌파하는 데 대우의 역할이 상당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우는 창업 초, 30여만 달러의 트리코트 오더를 받아 동남아시장의 트리코트 붐에 편승하여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국가의 정책에서 보듯이 한국이 살아날 길은 수출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술의 축적이 안된 상태여서 수출물량을 채우려면 창업주를 위시한 전직원들은 공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밝혀야 했고, 정상퇴근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청공장의 기술자들과 대우의 직원들이 함께 시간을 잊으면서 만들어낸 트리코트 지는 동남아에서 주로 셔어츠, 슬립 및 팬티, 파자마 등 내의류 원단으로 사용되었다. 또 인도네시아에서는 원주민들이 몸에 둘둘 말아 걸치는 겉옷류로도 쓰였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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