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실업의 최초의 오더는 방콕의 시아 후아트(Sia Huat L.P.)사로부터 받은 2만 야드의 트리코트(L/C NO.44055) 지였다. 그 가격은 5,676달러였다. 대우실업은 이 오더를 뚝섬에 있는 동업자 명의의 대도섬유공업사에서 제직하고, 영등포 소재의 동아염직에서 가공을 했다. 그리고는 통관을 위해 부산으로 실어날랐다.
그 날은, 대우로서는 잊지 못할 1967년 4월 28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통관된 품목은, 나이론 트리코트 원단 64,000 야드였다. 대우실업이 이날 통관한 64,000야드의 원단은 시아후아트 사의 20,000야드의 오더와 잇따라 방콕의 다른 바이어들과 홍콩의 바이어들로부터 받은 오더였다. 그러나 당시는 선적사정이 좋지 않아 55,000야드만 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할 지라도 대우실업으로서는 감개무량한 첫수출이었다.
첫수출의 성공이 연이은 성공을 몰고왔다. 이렇게 하여 대우는 창업 원년에 트리코트 한 품목만으로 58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전체 트리코트 수출의 11.2 %를 점하는 실적이었다. 대우실업이 선적을 시작한 지 겨우 9개월 동안에 쌓은 결과이니 실로 눈부신 발전이었다.
당시 기업 경영인들은 해외시장에 대해 어두웠다. 아니 알려고 조차 하지않았다. 그러므로 ‘수출하면 밑진다’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국내시장은 개척의 여지가 많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독점적 지위를 향유하고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내수만으로도 기업을 지킬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데 구태여 어려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수출을 한다하는 업자들도 광활한 해외시장을 개척하여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갖기 보다는, 정부의 각종 지원이 주는 혜택이나 누려보자는 소극적인 사고로 경영했으니 그 활동에 적극적일 리가 없었다.
대우실업이 세계를 향해 출사표를 던지던 해를 전후로 하여 세계 교역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편승해 한국의 교역량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1965년에 1억7,500만 달러 수준에서, 1966년 2억5,000만 달러, 1967년 3억5,000만 달러, 1968년 4억 5,500만 달러로 상승분위기였다.
대우의 창업주는 창업을 준비하면서 이미 수출시장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좁은 내수시장의 한계성 때문에 수출이 한국 경제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 대우실업이 수출전선에 쏟은 열정과 노력은 그 후 착실히 열매를 맺어갔다. 그리하여 오더는 늘어났고 직원의 수도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성장의 파도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