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일감이 늘어나자 대우실업은 대도섬유공업사만으로 수출 물량을 대기가 벅찼다. 결국 수출을 하려면 공장이 있어야 했고, 그 공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 방법은 하청을 늘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지역엔 신신, 신왕, 한일 등에 일거리를 맡겼으며, 부산지역에는 수일, 삼우, 한창, 삼진 등을 확보하였다. 가공공장도 동아염직으로 부족하여 부산의 세창직물에 임가공을 맡겼다.
그러나 하청공장과 가공공장을 확보한다고 하여 늘어나는 일거리가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청공장 운영만으로는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간파한 대우실업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체공장을 가지려고 노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의 제조업은 당시 겨우 걸음마 단계였고, 자본이 영세함은 물론 시설도 취약하였다. 더구나 대우실업처럼 급신장 하는 회사로서는 무역기능과 제조기능의 밀착이 더 효과적이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무역회사가 제조업을 겸하면서 근소 업체들을 묶어나가야만 양측이 위험을 줄이면서 성장해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창업주 김우중 당시 부장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대우실업의 성장이 이어질 것이라는 최종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공장설립에 필요한 일련의 조치를 해나갔다. 또 그래야만 대우실업이 생산업체가 되어 수출금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돼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창업주는 첫 시련을 맞았다. 그것은 창업동지와의 결별이었다. 대우실업의 수출물량은 폭주하고 있었고, 하청에 생산을 맡기는 것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쳤음에 자체공장을 설립하려고 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동업자는 자신의 몫을 챙겨 떠나갔다.
그렇게 되니 자본이 충분치 않던 창업주는 또다른 투자자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의 하청거래선 중에서 수일섬유라는 곳이 있었다. 대우실업의 미래에 대한 설명을 들은 수일섬유 대표는, 동래에 소유하고 있던 2,600여평의 부지를 현물로 투자했다. 그것은 대우실업의 저력을 적확히 분석하고 내린 최상의 결정이었다. 부지를 확보한 대우실업은 1968년 6월 독일로부터 최신 트리코트직기 10대를 발주하고 공장신축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우실업이 자체공장을 갖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던 그때, 국내 섬유시장에서 크게 활약해온 한양상사가 대우실업의 기계 발주를 엄청난 위기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한양상사가 바로 대우실업이 기계를 발주하기 한달 전인 5월 경 동일한 직기(織機)를 역시 동일한 숫자인 10대를 발주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한양상사는 대우실업의 물량을 소화해내면서 설비의 증설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고, 때문에 기계의 발주는 대우실업을 온전히 믿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고객이던 대우실업이 자체적으로 시설을 갖추려고 기계를 발주했던 것이었다. 고심하던 한양상사는 돌파구를 마련했는데, 그것은 발주했던 기계와 설비 일체를 현물로 대우실업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대우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필요한 공장시설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양상사를 흡수통합한 대우실업은 1968년 6월 20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온천2동 582-2번지에 공장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대우실업이 세우는 첫공장이라 임직원의 애정과 애착은 눈물겨웠다. 그 땀흘린 보람은 그해 10월 1일 열매를 맺어 가동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부산1공장의 탄생이었다. 동래에 소재하고 있다고하여 동래공장이라고도 불리웠던 이 공장은, 3개월 후인 그해 말까지 75만 야드의 트리코트지를 생산하였고, 대우실업이 오더에만 집착하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경제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자체공장을 가진 대우실업 임직원들은 밤낮을 잊고 생산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68년, 대우실업 총수출량의 6 %를 소화해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 후로도 동래공장은 월등한 품질수준을 유지하여 68년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봉제품 시장 진출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대우실업의 상표는 영타이거(Young Tiger)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원단하면 대우실업의 영타이거로 통할 정도로 날개돋힌 듯이 팔렸으며 창업주 김우중 당시 부장이 직접 가방에 견본을 넣고 다니면서 세일에 전념했다.
이후 대우실업은 1970년 10월 1일 동남섬유주식회사의 동남공장을 인수해 대우실업의 제2공장으로, 세창직물 공업사로부터 인수한 연산공장을 제3공장으로, 1972년 남양산업사의 양정공장과 반여공장을 제4, 5공장으로 명명(命名)하고 편직, 가공, 봉제공장을 완비함으로써 대형수출의 꿈을 펼치는 동시에 한국섬유 수출업 진로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특히 1972년 10월 20일 대우실업은 오늘날 부산공장이라 불리고 있는 제5공장의 증축공사를 위해 주변부지 2만6천여 평을 추가로 매입하고 착공 3개월만인 이듬해 1월, 21개의 봉제라인을 증설해 총 27개의 봉제라인을 보유하고 가동하게 되었다.
한편, 제5공장 확장공사 1차 준공 후 제1, 2공장의 봉제시설을 제5공장으로 이전하려던 대우실업은 1973년 2월 25일 밤, 제2공장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는 재난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제2공장의 봉제라인을 가방라인으로 전환해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우실업은 제2공장의 화재 이후 제5공장의 전문성을 살려 일괄생산 체제의 대단위 섬유공장화 계획에 박차를 가해 나머지 4개 공장에 산재돼 있던 편직 및 가공시설을 5공장으로 이전했다. 또 1974년에는 제2차 확장공사를 마침으로써 제5공장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의 생산을 자랑하게 되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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