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동남아의 트리코트 수출이 계속 급증하면서 대우실업의 사세(社勢)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8년 대우실업의 수출액은 291만 달러였다. 그러나 1969년에는 365만 달러를 기록해 명실공히 트리코트 수출왕으로서의 저력을 당당히 보여주었다.
대우실업이 대외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마디로 거래선과의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우실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거래선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것은 현지에서 바이어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지사설치에 대한 것이었다.
지사를 설치하고 폭주하는 물량을 소화하려면 사람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미 밝혔듯이 대우실업은 이십 평 안팍의 적은 사무실에서 5명의 직원으로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창업주 김우중, 동업자 도재환, 그리고 30년 동안 대우실업과 동거동락을 같이하고 오직 한마음으로 창업주를 보필해온 오늘날의 이우복(李雨馥) 회장과 김상중(金尙重), 여직원 이화자(李花子)였다. 그 밖에도 한성실업에서 전무로 모시다 그 연륜과 경험을 높이 산 조동제(趙東濟) 사장과 감사 도상환(都相煥)이 있었다. 그러나 사장과 감사는 서류상의 직원일뿐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5명이 전부였다.
부산 제1공장의 가동으로 생산기지를 확보한 대우실업은 폭주하는 오더를 소화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공장시설 증설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미 밝혔듯이 하청공장만 가지고는 성장을 계속할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원도 보충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의 보충인원 중에는 당시 한성실업에 근무중이던 윤영석(尹永錫)과 쌍용양회에 재직하고 있던 김영환(金泳煥)이었다.
당시 이들 두 사람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퇴근하여 대우실업에 들러 밤 늦도록 일을 도와주고는 했다. 윤영석은 창업주 김우중 회장과 한성실업에서 함께 근무를 한 이력이 있어 서로를 잘아는 사이었다. 또 김영환은 금성방직에 재직할 당시 이우복 회장과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조직의 역사는 인물의 등장이나 퇴장으로 하여 그 그림을 선명하게 하거나 퇴색시켜 왔다. 대우실업이 오늘날의 큰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재에 대한 깍듯한 예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입사를 했지만 여전히 손이 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부산지역에서의 생산, 검사, 통관, 선적 등의 업무를 맡길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추천을 받은 사람은 박세영(朴世英)이었다. 이어 유태류(兪泰柳), 이창근(李昌根)을 채용하였다. 또 여직원으로 박기선, 고명자, 김현숙이 대우실업의 새가족이 되었다.
식구가 늘자 20여평 남짓한 사무실이 좁아졌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 1일, 대우실업은 사무실을 무교동의 동영빌딩으로 옮겼다. 그리고 2명이 채용되었는데, 그들은 장덕상(張德相)과 한동완(韓東完) 사원이었다.
대우실업의 상근직원 수는 모두 14명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앞에서 언급한 이들 외에, 박세우(朴世雨), 김창규(金昌圭) 등이었다. 이들의 열정을 덧붙인 노력은 그해 58만 달러 수출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이는 한국전체 트리코트 수출의 11.2 %에 달하는 실적이었다.
오더가 늘어나자, 선적항 부산지역의 하청공장이 역시 늘어갔다. 이에 필요한 것은 부산지역의 물동량을 관리하고 수출입 통관 및 선적, 하청관리를 담당할 연락사무실이었다.
이어 대우실업은 1968년 4월 1일, 부산사무소를 전격 가동했는데, 그 총책은 윤영석이었고, 실무진은 박세영과 박세우, 김창규였으며, 주소는 부산시 중구 중앙동 4가 366번지였다.
대우실업의 사세가 커짐에 따라 조동제 사장이 물러나고 황해정이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또 수일섬유의 대표로 있던 신근수도 대우실업의 상무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한양상사에 재직중이던 이석희(李奭熙)도 대우실업의 가족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창업주 김우중은 상무로 승진했다. 이들의 영입은 의리를 존중하는 창업주의 배려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하여 1968년 조직이 정비되면서 동래공장의 공장장은 처음부터 공장건설 실무를 맡았던 윤태석(尹泰錫)이 생산기술 담당은 정진백(鄭鎭栢)이 담당했다.
1969년 5월 1일, 부산 소재 트리코트 편직회사인 고한실업이 업계의 과당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대우실업에 회사인수 요청을 해왔다. 고한실업은 1967년 트리코트 붐에 편승하여 트리코트 직기 3대, 연사기 1대 등을 들여놓으면서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업계의 과당경쟁이 심화되고 채산성이 악화되면서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박응천 사장은 대우실업에 회사인수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고한실업을 인수한 대우실업은 연산동에 있던 설비를 동래공장에 이설(移設)하여 생산시설을 보강했다. 대우는 그 과정에서 종업원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대우실업은 1971년 학교추천으로 4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다. 이 신입사원 입사가 대우 공채의 시원이었다. 그 후 2년이 지난 73년 공채제도로 발전하여 신문에 공고를 하여 공개채용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모집인원은 33명었으나 응시자는 390명이었다. 그러나 33명중 경력사원이 24명이나 됐다. 당시는 회사의 존립이 가장 관심의 초점이었으므로 당장에 일할 수 있는 경력자를 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74년, 그룹공채가 실시됐다. 이때 응시자수는 1,400명이었고, 채용인원은 43명이었다. 또 대우는 우리나라 기업으로는 역시 처음으로 기혼여성의 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능력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계약사회로 내딛는 발걸음이며 우수한 재원을 가정에 묶어놓지 않고 인력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대우는 이땅 최초로 대졸여직원을 공개채용했다. 대졸여사원 공채는 고급여성 인력의 효율적인 활용이란 측면에서 각 분야에 걸쳐 200명의 여자사원을 모집했는데, 모집 예정인원의 26대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나타냈다.
또 1993년 대우는 국내 최초로 입사 희망자를 대상으로 채용박람회를 개최했다. 93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4일간 열린 이 채용박람회는 서울은 힐튼호텔, 부산은 부산대, 대구는 대구빌딩, 전주는 실내체육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대우는 또 1992년부터 인턴사원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 역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한 제도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국가에서 성공적인 인턴제도의 실례가 있으나 다만 그 우수성을 인정할 뿐 산학협동체제가 일천한 국내에서는 기업의 현실여건으로 시기상조라는 반대의 목소리만이 있었다. 그러나 대우는 과감히 이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앞서가는 인사제도에 한걸음 더 내딛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려운 채용환경 변화에 즉응하기 위하여 우수인력의 개념을 일에 대한 정열과 투철한 대우정신의 소지자라는 시각에서 평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밖에도 대우는 임직원의 자질향상과 업무수행 능력의 개발을 위하여 미시간 MBA와 미시간 AMP과정 보스톤 EMBA 해외유학연수제도를 1981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연수대상자에게는 등록금 전액, 체재비, 급여 지급 등을 통하여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다. 주요 유학 파견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이었다.
또 21세기 무국적 기업을 꾀하고 있는 대우는 ‘경영의 현지화’를 통하여 세계경영을 이룩하고자 해외인력 국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95년에 중국 현채인들에 대하여 한국어교육 및 경영실무교육을 마쳤고, 1996년에는 중국, 베트남 현채인에 대한 교육을 마쳤다. 또 인도, 루마니아, 폴란드 등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또한 루마니아 정부의 추천을 받은 유학생들을 비롯하여 동구권 학생들을 위한 아주대 국제대학원 연수과정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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