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실업이 초기 수출의 주력시장으로 삼았던 동남아는 1968년 여름이 되자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한국 등지로부터 수입한 트리코트의 70 %를 인도네시아와 중동 등지에 재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국의 관계가 악화됨으로써 싱가포르의 대 인도네시아 수출의 길이 막혔던 것이다.
하여 싱기포르에 다량의 트리코트 지를 수출하고 있던 한국 업체들에게는 양국의 관계가 적지않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여파로 한국의 트리코트 수출은 전년도 1,279만 달러에서 1969년에는 1,262만 달러로 오히려 감소하는 형편이었다.
대우실업은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지금까지 바이어의 주문에 의존하던 소극적 입장에서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환한다는 전략이었다. 현지 시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취합과 그때 그때 적절한 대처로 불황을 타개한다는 게 기본기획이었다.
경영진은 심각한 논의를 거쳐 해외지사 설치를 검토하게 되었다. 첫 지사설치 검토 대상지역은 싱가포르, 시드니, 나이지리아, 이디오피아, 베트남 등지였다.
그리하여 숙고와 많은 비교검토를 거쳐 마침내 세 곳이 우선 결정되었다. 지금까지 수출 거점이었던 싱가포르와 신규시장으로서 개척의 여지가 큰 뉴욕과 시드니가 그 곳이었다.
드디어 1969년 8월 24일, 시드니 지사가 설치되었고, 한달 후인 9월 25일, 싱가포르지사가 문을 열었다. 시드니 지사는 대우실업의 1호지사였지만 활동면에서는 2호로 문을 연 싱가포르가 더 활발했다. 결국 싱가포르 지사의 개설이 오늘날 대우가 세계 속의 대우로 성장하게 되는 거대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는 1인 지사(당시 윤영석 차장)로 출발한 싱가포르 지사는 나일론 트리코트 등의 섬유제품을 주로 취급했다. 그러다가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계, 비료, 금속, 선박수리 등 중화공제품으로, 다시 전자, 식품, 화학 및 금속제품, 자동차 중장비 등으로 취급품목이 다각화 되어왔다.
지사설립을 통해 적극적인 시장개척 노력을 하다 대우실업은 현지의 악조건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보다 많은 수출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69년 대(對) 동남아 한국 업체의 트리코트 수출액은 전년도에 못 미치지만 대우는 365만 달러를 기록하여 전년도의 291만 달러 보다 무려 125 % 성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9월 7일, 미국 뉴욕지사를 개설함으로써 한국의 대미 의류수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경영진은 미국의 잠재적 시장수요가 실로 무궁무진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의류수입이 매년 20-30 %씩 늘고 있는데다 주요 수출국인 일본은 인건비 상승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한국이 아니, 대우실업이 유망주로 부각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유명상점에 진열된 의류의 생산지는 대부분이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상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소비왕국이기도 한 미국은 제품수준도 다양하여 한국상품이 진출할 여지는 무한히 많았다. 그런데도 한국제품은 일본산 제품에 밀려 진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뉴욕에 지사를 설치한 대우실업은 시장조사를 세밀하게 착수하였다. 검토를 거친 후 내린 결론은 트리코트 원단을 새롭게 개발하여 미국인의 기호에 맞는 의류를 생산해 내자는 것이었다.
미국시장을 공략할 계획을 수립한 대우실업은 조직을 보강하기위해 개편을 실시했다. 개편의 내용은, 봉제과 신설, 스웨터과 보강, 지사 정예요원 파견이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부산공장에 나일론과 테트론으로 편직하던 소재를 다양화시켜 고급의류에 적합한 트리코트 원단을 개발하는 데 노력했다. 당시 한국의 의류수출은 70 % 가량이 미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62년 처음 의류수출이 시작된 이래 연평균 90 %선의 급성장이었다. 한국으로부터 의류수입이 점증하게 되자 미국의 수입업자들이 한국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들 수입업자들은 주로 드레스, 셔츠, 스웨터 등을 취급했다.
대우실업은 회사의 명운(命運)을 봉제품 수출에 건다는 각오로 혼신을 노력을 기울여갔다. 드디어 1969년 11월 2,000타(6,710 달러)의 오더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 첫 번의 성공은 바로 님코(New York Merchandise Co.(NYMCO)의 현지 사무소인 신양사에 제시된 베스트 쇼트(Vest/shorts) 샘플이 오더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다음달인 12월에는 미국 수입상인 리퍼블릭(Republic)으로부터 대우실업이 새로 개발한 트리코트 원단 티셔츠 5,000타와 복서 쇼트(Boxer Shorts) 67,500타 외에도 계속 오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영진의 심사숙고가 적은 결실을 맺는 한 해였다. 당시로선 지사를 설치한다는 것 그 자체가 남들이 생각 못할 발상이었고, 또 원단에서 봉제로의 전환도 앞서가는 결단이었다. 안주하지 않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대우의 저력은 이미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