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미국시장 조사를 끝내고 내린 결론은 기존의 트리코트 원단만 가지고는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급 원단의 개발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대우는 대폭적으로 회사 기구조직을 보강하기에 이르렀다. 봉제과 신설, 스웨터과 보강과 해외지사의 설치가 그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부산공장에서 고급 트리코트 원단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심혈을 기울여 준공한 새마을공장 1호인 비봉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 위치한 <비봉새마을공장>은 농가부업의 공업화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1970년대 새마을사업에 의해 건립된 국내최초의 새마을공장이었다.
비봉공장의 주생산품은 스웨터로 전량을 해외로 수출하였다. 형식과 겉치레에 치우쳐 새마을공장 본래의 취지를 흐리게 하고 있는 일부 실효성 없는 공장들과는 달리 비봉공장은 농가소득 증대와 유휴 노동력의 흡수라는 새마을 사업 본래의 기능을 다하고자 대우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공장이었다. 그러나 1975년 3월 29일 불시의 화재로 출고를 기다리던 3월분 생산량이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곧 전종업원이 일치단결하여 화재에 대한 어려움을 딛고 4월 한달동안 6만5백56매의 스웨터를 생산해내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것은 전임직원과 현장 종업원이 잔업을 마다않고 합심하여 이룩한 결과였다.
하지만 비봉새마을 공장은 많은 겉치레 형식에 치우쳐 적자에 허덕이는 여타의 새마을공장들의 도산에 휩쓸려 78년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그 운명을 다하였다. 대우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애초부터 새마을공장이란 이름표를 달고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당시 한국 수출의 70 %는 대미수출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수입업체인 리퍼블릭, 스타라이트, 씨비에스, 하다드, 님코 등이 한국에 사무실을 차렸다. 대우는 이들업체들을 수시로 방문하여 관계유지를 지속하면서, 그들에게서 봉제업에 대한 개념을 배워나갔다. 당시 대우의 직원들은 봉제업에 대해 잘 몰랐다. 과책임자 조차도 원단 세일즈만 해왔기 때문에 원단에서부터 핀에 이르기까지 30여 가지의 원부자재를 적시에 공급해 가공해야 하는 복잡한 봉제의 생리를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길은 열렸다. 당시 대우의 사무실이 있는 동영빌딩 2층에 한창섬유가 입주해 있었다. 한창섬유는 1967년 7월에 설립된 회사로 트리코트 제직과 봉제품 수출에 주력하는 회사였다. 처음부터 봉제에 주력해 왔기 때문에 한창섬유의 직원들은 대우의 직원들보다 봉제에 대해 전문가였다.
대우의 직원들은 한창섬유의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봉제에 대한 상식을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에 님코(New York Merchandise Co)의 현지 사무소인 신양사에 게시된 베스트쇼트(Vest/shorts) 샘플이 오더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 11월 2,000타(6710달러)의 오더를 수주할 수 있었다. 그 오더가 ‘대우봉제’의 서장이었다.
12월에는 미국 수입상인 리퍼블릭(Republic)의 현지사무소인 두원산업으로부터 받은 아세테이트 70데니어를 사용하여 새로 개발한 트리코트 원단을 사용한 티셔츠 5,000타와 복서쇼트(Boxer short) 67,500타 등 큰 오더가 계속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원단에서 봉제로의 중심점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섬유시장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 오던 대우실업은 많은 바이어들과의 접촉 결과 언젠가는 섬유수입 규제가 이루어지리라고 내다봤다. 면제품에 대해서는 이미 쿼터제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대미 면제품 쿼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무렵 아시아에서는 홍콩이 쿼터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쿼터의 배정시에 쿼터 적용 직전의 일정기간 동안 미국에 수입된 양을 국가별로 배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의류수출이 상대적으로 늦은 한국은 쿼터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즈음 거론되고 있던 합섬류 쿼터도 틀림없이 국가별 수출량으로 기준 잡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대우실업은 어떻게든 수출량을 늘이지 않으면 합섬류 쿼터도 면제품과 같은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대우는 이에 대한 대비를 해나갔다. 대비책으로 이미 언급한 대단위 봉제공장 건설을 서둘렀다. 자체공장이 있어야만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청공장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며, 기술지도를 함으로써 제품의 품질향상을 기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도부터 보세가공 수출로 시작된 한국의 의류수출은 1970년대 들어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고 하나, 질적인 면에서의 발전은 떳떳이 자랑할만한 게 못되었다. 원부자재 전부를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형편이었고, 원단도 일부 개발되고 있었으나 가격이나 품질면에서 경쟁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것은 국제하청이었고 당연히 부가가치도 보잘 것 없었다.
그리하여 대우는, 부가가치 제고를 위한 원부자재 개발과 쿼터에 대비한 수출물량 확대를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우는 원부자재 공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당시 섬유 원부자재는 거의 전부를 일본 오사카에서 들여왔고, 때문에 오사카지사 설치는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하여 대우는 1970년 6월 25일, 오사카에 지사를 설치하여 원부자재 공급창구 역할과 세계적 바이어들과의 접촉장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덧붙여 미국에 현지회사를 설치하여 스톡 세일즈를 시작했다.
시드니와 싱가폴 지사도 사실은 스톡 세일즈를 구상하고 설치하였으나, 원단의 경우에는 스톡 세일즈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봉제품은 어느정도 규격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스톡 세일즈가 성공한다고 내다봤던 것이다.
대우는 우선 동부권을 겨냥하여 설치된 뉴욕지사(1970년 9월)를 통해 스톡 세일즈를 시작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미국의 서부지역인 L.A 현지법인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스톡 세일즈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