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는 1970년 7월부터 자체공장 12개 생산라인의 가동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제품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제품은 주로 값싼 트리코트 셔츠가 주종이었다. 소재는 폴리에스터를 섞어 짠 것이 많았는데, 염색기술을 향상한 트리코트 셔츠가 대부분이었다.
동남섬유를 인수할 무렵 대우는 자체 기술진으로 하여금 심혈을 기울여 개발케 했던 아세테이트를 사용한 트리코트 제직에 성공했었다. 대우실업은 이 원단으로 옷을 만들어 미국시장에 선을 보였는데, 결과는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미국의 수입규제 조치가 임박했음을 피부로 느낀 대우는 1971년 6월부터 동래, 동남공장에 모두 9개 라인의 봉제시설을 증설해 가동함으로써 쿼터에 대한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예상했던 대로 1972년 1월 4일, 한미 양국 정부는 각서교환 형식으로 ‘인조섬유 및 모직물의 교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대한 규제조치는 1971년 10월 1일자로 소급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은 1971년 10월 1일부터 1976년 9월 30일까지 5년간 적용되었는데, 기본 쿼터 증가율은 제3차 연도에 정하기로 하며 모직물은 매년 1 %씩 증가시킨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섬유류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정은 1961년 10월부터 1962년 9월까지의 단기 면직물협정(STA)이 처음이었는데, 1962년 10월부터는 이 협정이 장기면직물 협정으로 대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1964년 12월 28번째로 이 협정에 가입하고 1965년 1월에는 한미간 편직물 교역에 관한 쌍무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후 이 협정이 계속 수정되면서 연장되왔다.
그러다가 1972년 1월 4일 한미간 인조 및 모제품 교역 자율규제 협정이 조인되면서 1971년 10월 1일부터 소급실시를 보게된 것이다. 그후 1974년 1월부터 면제품 및 모, 인조, 섬유를 묶은 제1차 다국간 다종섬유류 협정(MFA Ⅰ)이 발효됨에 따라 종전 2종류의 한미간 섬유관계협정이 ‘면․모 및 인조섬유 교역에 관한 협정’으로 대체되었고, 1977년과 1982년에 MFA Ⅱ 및 MFA Ⅲ로 각각 연장되었으며, 1986년 8월에는 식물성 섬유가 추가되면서 MFA Ⅳ(5년간)로 되는 등 한미간 섬유협정은 그 내용이 계속 수정되었다.
자율규제에 의한 1971년 10월부터의 섬유쿼터는 대우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비록 의류에 관한 한 후발업체였지만 배정기준 기간인 1970년 4월 – 1971년 3월 사이의 대우 섬유수출 실적은 대단한 양이었던 까닭이었다. 대우의 경우 아세테이트 트리코트 셔츠류가 수출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트 쿼터를 상당량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우의 우븐쿼터에는 동남섬유의 인수에 기인한바가 컸다. 동남섬유는 트리코트 편직을 하면서도 우븐 셔츠류를 많이 수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우는 당시 한국 전체 쿼터량의 약 1/4 정도를 확보하게 되었는데, 단일회사로는 동남아국가(홍콩, 대만) 중 가장 많은 양이었다.
당시에는 오픈 쿼터가 많았는데, 누가 먼저 관련 L/C를 받아 신청을 하느냐가 오픈 쿼터 배정의 관건이었다. 현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스톡 세일즈를 하고 있던 대우와 경쟁할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대우의 쿼터는 눈덩이처럼 불어 품목에 따라서는 1/3을 점유한 것도 있었다.
쿼터제 실시로 인한 물량규제가 시작되자 미국 섬유시장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다른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는 전후 세대가 사회활동의 주류를 이루면서 정장보다는 간편한 케주얼 웨어를 선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빨아입기 불편한 면제품 보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편리한 합성섬유에 대한 붐이 일고 있었다. 또한 임금수준이 높아지면서 섬유류 제품의 미국내 수입 비중도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섬유류 수입규제가 실시됐다. 당연히 수입물량이 부족하게 되었고, 물량이 부족하게 되면서 가격이 껑충 뛰어 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쿼터는 그대로 돈이었다. 그 돈인 쿼터를 대우는 국내 쿼터량의 1/4를 확보했으니 그야말로 급성장 중의 급성장이었다.
대우의 1972년 한해 수출량은 200만타를 상회하였다. 섬유 수입규제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우가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은 제품개발에 대한 전직원의 노력에 힘입었다. 그리고 덧붙여 경영진의 선견지명에 의한 과감한 생산시설 확충과 해외시장개척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