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대우실업은 명실상부한 민족기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1973년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기업은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 근대적 경영방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과 정부로부터 차입하는 간접금융에 의존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기업자체의 자금조달 능력제고를 위한 방안으로 법을 제정하여 1973년 1월 5일부터 기업공개촉진법을 개정, 시행하였다. 하지만 그 주체가 되어야할 기업들은 경영에 관한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업공개에 냉담했다. 그러나 대우실업은 기업의 사회성을 제고시키고 자기자본을 늘려 세계 속의 대우로 발전시키겠다는 취지에서 기업공개를 결심했다.
1973년 6월 6일 이사회에서 기업공개 방침이 최종 결정됨에 따라 회사는 본격적인 기업공개 실무작업에 돌입했다. 6월 11일부터는 주요일간지에 신주 청약안내 광고를 게재하였다. 또 대우실업은 신주공모의 산정에 있어 회사의 높은 성장성, 수익성, 안전성, 활동성을 바탕으로 500 %의 프레미엄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재무부의 조정으로 330 %로 낙착되었다.
330%라는 높은 프레미엄을 붙여 신주를 공모한 기록은 한동안 최고의 기록으로 유지되었다. 당시 대우실업의 인기는 대단해 액면가 3억원(60만주) 모집에 무려 61억원(프레미엄 포함시 263억원)의 청약금이 몰려 20.4:1이라는 치열한 경쟁율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주식배정은 50주 청약에 3주, 최고청약인 3,000주에는 148주가 배정되었을 뿐이었다. 6월 15일에 주금납입이 완료되고, 6월 30일 신주 공모처인 제일은행 본점 강당에서 개최된 임시주주총회에서 <공개법인 요건 확인의 건>이 원안대로 가결됨에 다라 세인의 이목이 집중됐던 대우실업의 기업공개가 이루어졌다.
대우실업의 기업공개는 당시의 일반적인 기업풍토를 감안할 때 주위로부터 어떠한 권유나 종용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해진, 그야말로 진취적이고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았다.
자본시장 육성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1969년 12건, 1970년 9건, 1971년 4건, 1972년 6건으로 점차 둔화됐던 공개모집은 대우실업이 기업을 공개했던 1973년 한해동안 35건에 달하여 기업공개 붐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대우실업은 자금조달로 회사의 성장을 주도했던 수출력을 가일층 강화하였음은 물론 국내외적으로 격변하는 경제질서에 기민하게 대처해 나가기 위해 금융, 기계, 건설, 전자산업 등에 참여하고 미개척 시장에도 진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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