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1972년 10월 17일, 정부는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비상적인 체제개혁을 시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으며 비상국무회의로 하여금 국회권한을 대행케 했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대통령 중심의 권력집중과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을 의결했고 이 헌법개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었다.
개정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구성되었고, 여기에서 박정희를 또다시 새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유신체제인 제4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정부는 1973년 1월, 대통령 기자회견을 통해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했다. 그리고 5월에는 중화학건설 원칙이 발표되어 선언내용이 구체화되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 내용은 원자재 해외 의존도를 감소시키고 부가가치 생산성을 높이며, 수출산업 고도화를 위해 제철, 조선, 금속, 석유화학, 비철금속, 정유 등 6개 업종을 선정하여 국제규모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1960년대 경공업 수출산업 위주의 외자의존적 공업화가 야기한 산업구조 불균형과 나약화된 공업체질 극복을 위해 고도화된 산업구조가 필요하다는 경제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중화학공업화의 계획과 효율적 추진을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신설되고 위원회 아래 실무를 총괄하는 중화학 기획단이 설치되었다. 중화학공업 계획은 제1차 석유파동과 연이은 불황으로 일시적으로 그 추진이 축소되어 연기되기도 했으나, 정부의 확대 균형정책과 중동건설 진출 등 경제전반이 호황에 접어든 1976년부터 강력히 추진되었다.
중화학공업화 추진이 본격화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동안 이 분야에 대한 투자는 연간 국민총생산의 26.2%까지 확대되었고, 기계공업 육성계획, 장기 자동차 진흥계획, 기계류 국산화 지원방침 등 관련 정책들이 추진되었으며, 정부의 강력한 추진정책에 힘입어 급속도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79년에는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1.2 %를 넘어섰고, 수출에서 중화학 공업제품의 비중도 1960년대의 10% 미만에서 38.4 %까지 증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민간기업이 사업의 주체였기 때문에 정부는 민간기업의 중화학공업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세제상의 혜택, 재정․금융지원, 외자 및 기술도입 촉진 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육성책을 펴나갔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은 국제수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규모를 국제화한다는 기본전략에 따라 대기업 중심으로 육성되었다.
그러자 대기업들은 정부지원의 확보와 기업규모 확대를 위해 중화학공업 분야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중화학공업화의 진척은 동시에 민간 대기업의 거대화를 가져다 주었다.
정부는 또 수출증대를 위해 1975년 종합무역상사 설립규정을 마련하여 적절한 조건을 갖춘 종합상사에 대해서는 수출지원 자금을 제공하고 세금과 외환관리상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종합상사를 중심으로한 대기업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기업의 거대화는 한국사회의 직업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기업이 확대되고 급성장하면서 전반적으로 취업인구가 증가 했으며, 기술직, 사무직, 판매직 등 화이트칼라로 불리우는 신중산층과 고위관리직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직업구조의 변동은 결국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확대와 직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성장한 대기업들은 산업구조 고도화의 주역을 담당했을 뿐만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확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에 힘입은 기업의 거대화는 많은 부분이 정부지원과 특혜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국가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할 수 없었고 기업체질 면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체 산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이 높아져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기는 했으나 중화학공업의 기초 생산재보다는 내구 소비재에 편중 발전했으며, 중화학공업제품 수출도 가공, 조립제품이 주종을 이루어 여전히 산업구조 불균형과 대외의존성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중화학공업 비율의 증가와 수출증대는 곧 외국자본과 기술 의존도를 심화시켰으며 생산재와 부품 수입을 유발하여 무역수지 적자폭을 확대시키는 폐해도 가져왔다.
이처럼 눈에 드러난 부분적 폐해 탓으로 한국경제를 주체적으로 이끌어온 기업들은 경제개발에 기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정책은 1970년대 말에 접어들자 구조적 문제들이 노정되면서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경제개발 목표 조기달성을 위해 1977년부터 일기 시작한 과도한 경기과열은 물가상승 압력을 가중 시켰으며 중화학공업 분야에 대한 과잉, 중복투자는 자금부족을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제2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경기가 침체되고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가 더욱 강화되어 수출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내수 역시 한계에 달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 급속하게 성장해온 중화학공업은 1979년부터 가동율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기업의 재무구조도 악화되었다. 또한 국내의 자본부족은 외국자본 의존도를 심화시켜 이에 따라 외채문제가 큰 부담으로 대두되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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