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수출실적 2위를 기록한 대우의 이력은 창업 5년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5년동안 대우는 착실히 성장기반을 구축하였고, 그동안의 수출활동에서 축적된 자금력으로 1973년부터 본격적인 경영다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즉, 지금까지의 섬유산업 위주 경영을 탈피하여 수출품목을 다양화 하고 또 이를 위한 안정된 공급선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대우 경영다각화의 초기인 1970년 초를 살펴보면 섬유 및 피혁제품 등 경공업제품 생산기업 인수에 의한 생산거점 확보가 주목적이었으나 이후에는 점차 다양한 업종으로 확산되어 왔다.
대우는 특히 경영의 다각화에 있어 처음부터 금융업진출에 주력했다. 이는 지금까지의 중소기업 수준에서 일거에 대기업 그룹화의 길을 걷고자 했던 패기만만한 대우에게 있어 금융자금의 원활한 공급이 안정적인 경영다각화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중반의 한국의 산업 및 무역구조가 경공업 중심에서 점차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될 조짐을 보이자 대우는 다각화의 방향을 중화학공업 분야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1973년 대우기계, 1974년 대우전자 등 소규모 기업인수에 의한 중화학 및 전자산업 참여로부터 시작된 신규분야 사업은 1976년부터 본격화되어 같은 해에 한국기계공업과 대한보일러를 인수했고, 또 1978년에는 옥포조선과 새한자동차 등 대규모기업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1970년대 중반에 일어난 해외건설 붐과 관련하여 1973년 대우건설의 설립으로 건설부문에 참여, 사세 신장을 기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술적 뒷바침을 위해 대우엔지니어링도 설립하였다. 덧붙여 1980년대 대우는 리비아의 신화를 창조했고 그 여력으로 당시 부실기업으로 판정받은 경남기업을 1984년 11월 16일 인수하여 해외건설 개척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외에서의 활발한 프로젝트 수주와 건설수주를 통해 급신장을 계속해왔으며, 1982년에는 종합상사 대우의 해외지점망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우실업과 합병하여 주식회사 대우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우는 초창기 상사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해 오면서 불가피하게 내재시켜 왔던 중심생산 거점의 부재라는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었고, 각 부문 단위로 중심기업을 둘러싼 거대한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즉 한국기계와 대우기계의 합병에 의해 탄생한 대우중공업이 중화공부문의 주력기업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새한자동차 인수후 제너럴 모터스(GM)로부터 경영권을 인수받아 탄생한 대우자동차는 자동차 부문에서, 1983년 3월 14일 대한전선 가전부문을 인수한 국내 3대 가전메이커의 하나가 된 대우전자가 전자부문에서, 그리고 옥포조선 인수후 우여곡절 끝에 대형조선소로 재출범한 대우조선이 조선해양부문에서, 각기 부문의 중심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1983년 3월 15일 대한전선측이 소유하고 있던 대한통신 주식 잔여분을 대우측에서 인수해 동년 9월1일 광진전자와 흡수합병해 대우통신으로 태어나 통신기기와 광통신, 컴퓨터를 생산하는 통신부문과, 1983년 12월 22일 삼보증권과 합병한 대우증권이 금융부문에서, 힐튼호텔이 서비스부문에서 주력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대우의 경영다각화는 짧은 기간에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경영이력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대우의 경영다각화는 세계경제 및 세계시장 동향에 맞추어 공급체계를 확대시켜온 이른바 마케팅 지향적 경영다각화라는 점이다. 따라서 다각화의 과정이 매우 급박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다각화의 초기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그룹내부에 있어서는 공급체계간의 유기적 관계와는 거리감이 있는, 말하자면 복합기업(Conglomerate) 형이다.
둘째, 대우의 경영다각화는 한국의 산업발전 방향과 동일한 궤도로 추구되어 왔으며 동시에 정부의 산업개발 정책과 동일선상에서 이룩되었다. 풀자면 정부가 원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는 말이다. 이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대우의 다각화전략은 그 자체로서 한국산업 발전의 관건이된 경우가 많았고, 나아가 그 발전 방향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찾음으로써 국부창출이라는 면에서도 선구적 입장을 줄곧 지켜왔다.
세째, 대우는 다각화 실행에 있어 신규기업 설립보다는 기존기업 인수 쪽을 택했다. 대우가 인수한 대부분의 기업은 인수 당시 극심한 부실기업들이었다. 이러한 기업인수의 특징은 짧은 시일내에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대우가 미래에 있어서도 급속한 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경영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또한 인수된 부실기업이 정상화됨으로써 대우는 밖으로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내부적으로는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안팍의 사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대우의 부실기업인수를 가속화시킨 인자가 되기도 했다.
네째, 맨 먼저 금융부문을 확충함으로써 계속되는 기업인수 등 다각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대우는 금융부문 진출자체도 다각화 전략의 일환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는 선발기업들이 아직 진출하지 않은 금융부문을 후발업체인 대우가 선점함과 동시에 금융부문 자체의 혁신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우는, 세계의 시장동향과 국내의 비교우위 구조를 적절히 대응시킴으로써 급속한 수출증대를 이룩했고, 이러한 수출증대를 통해 다각화된 기업그룹 유지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대우는 상사주도형의 다각화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74년 8월 5일 대우인력관리위원회의 설치 운영에 이어 1979년 9월 4일 기획조정실을 설치하여 그룹의 다각화 운영을 보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