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실업의 출생지인 자그마한 공간, 동남도서(東南圖書)빌딩은 도시계획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당시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대우의 생가(生家)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 도서빌딩에서 대우실업은 신장되는 사세와 늘어나는 사람으로 1967년 10월 1일 중구 을지로 1가 82에 위치한 동영(東映)빌딩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대우실업이 입주한 사무실은 5층에 있었고, 약 20여 평이었다. 그러나 불어나는 일 처리로 6층의 일부를 더 사용했으나, 그것도 부족하여 10층(옥상)에 사무실을 지어 사용해야 했다.
1970년 4월, 대우실업 가족의 수는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비좁아 더는 동영빌딩에서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사무실을 이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우의 숨결이 배고 손때가 묻은 동영빌딩을 안타깝게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도심 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 5월, 대우실업은 명동의 성보(聖寶)빌딩으로 이전했다. 이때는 대우실업이 봉제품 수출을 막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대우실업은 이 사무실에서 최초로 정규대학 출신 신입사원을 채용하였다. 1970년 5월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는 회사의 인지도가 낮아 능력있는 인재의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수인원을 선발하여 부족한 일손을 메꿀 수는 있었다. 어쨌든 회사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봉제수출을 하게 되었고, 그 노력에 힙입어 1970년, 1971년 연이어 철탑,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1972년 3월, 대우실업은 종합상사로의 비상을 꿈꾸며 새로이 사무실을 넓혀 나가게 되었는데 바로 동화(東和)빌딩이었다. 위치는 중구 을지로 2가 199-15였다.
이곳으로의 이전은 1972년 2월에 설치된 조선호텔 쇼룸과의 연계를 감안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무실과 쇼룸을 쉽게 오가며 활발한 상담을 진행하고 그 영업성과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봉제수출로 기반을 구축한 대우실업은 1972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이듬해 몇 년 간의 셋집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동화빌딩에서 1년 남짓 입주해 있었던 기간동안 회사는 사실상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대미 자율 쿼터 실시후 대우실업은 도약을 계속했고, 그 결과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마침내 1973년 4월 29일 현 대우빌딩 옆에 있는 삼주(三洲)빌딩을 인수하고 대우빌딩이라 명명하였다. 총건평 3만6백9십 평방미터로 창조와 도전과 희생이 정신인 대우 임직원들의 일터가 된 것이다. 창업 6년만에 당당히 내집에 문패를 단 대우인은 일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사기는 오르고 업무는 신바람이 났다. 그 신바람에 덧붙여 대우실업은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그리하여 경영의 다각화와 수출의 다각화로 이른바 지금의 큰집을 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교통센터(현 대우센터)를 완공하기 위해 1975년 12월 22일 대우빌딩을 당시 럭키그룹에 매각해야만 했다. 그 금액은 47억원, 대우처분의 1호였다.
대우가족의 일터가 된 대우센터는 오랜동안 대우가족의 큰집으로 상징돼 왔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대우하면 대우센터를 우선 떠올리게 만든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수도권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우센터는 명실공히 대우가족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큰집이었고, 지금도 그리고 먼훗날까지도 그럴 것이다. 이 큰집에서 대우가족은 세계경영을 구상했고, 실천했으며, 오늘도 세계 유수기업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우센터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68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부는 철도의 근대화와 철도의 획기적인 발전의 기틀을 조성할 목적으로 서울역 앞에 종합교통센터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소재지는, 중구 양동 286번지. 그러다가 1980년 7월 지번 변경으로 오늘날의 소재지인 중구 남대문로 5가 541이 되었다.
대우센타의 특징은 초현대적인 설비를 고루 갖춘 안전하고 멋진 초대형 빌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있다가는 숨가쁘게 펼쳐지는 경쟁에서 불리하지만, 그래도 눈부시도록 화려했던 대우센터의 지난날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는 누가 뭐래도 국내 최대의 빌딩이었고, 때문에 대우센터가 무사히 완공될 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우센타는 각 층별로 약 1,200여평의 넓은 사무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 중간기둥이 비교적 적고 최신 이동식 칸막이를 사용하여 구조변경이 용이하고 공간이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게다가 대우센터는 시내외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편리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대규모 주차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 주차빌딩에는 차량 750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도록 순수한 목적으로 설계 되었다.
철도청의 계획에 의해 교통센타는 서울역 앞에 지하 2층, 지상 23층,주차건물 8층으로 철골과 철근 콘크리트조로 된 견고한 건물이 들어설 준비가 완료되었다. 연건평 3만여평의 규모로 지어질 건물은 1971년 11월에 5층까지 내외장 공사를 마무리짓고 23층 중 12층에 이르도록 골조공사를 완성하였으나 예산과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2년이 지난 1973년 12월, 철도청의 재산처분 결정에 따라, 이런저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대우실업이 교통센타를 전격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 최대규모의 빌딩을 건설하기 위하여 대우는 이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재설계에 착수하였다. 건물설계와 공사는 대우개발 기술진을 주축으로 국내외 저명한 건축전문가의 참여와 자문으로 이루어졌다.
1년여의 노력 끝에 1975년 5월 9일 13층에서 23층까지의 모든 철골조립공사가 완료되어 상량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교통센터는 대우센터라는 새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