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197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의 공업화는 1960년대의 섬유제품, 잡화류 등의 단순노동 상황에서 크게 진척을 보이게 되었다. 중화학공업화는 경공업에 비해 월등한 규모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화학공업 초기부터 국제경제 단위를 지향하여 시행되었다. 때문에 이를 뒷바침할 마케팅 능력과 소비시장의 창조라는 점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해 그 활로는 필수적으로 수출시장 개척에서 찾아야 했다. 이에 대응하여 기존의 수출기업들은 지금까지의 소품목 전문 수출체제를 지양하고 적극적인 다품목 거래에 나서게 되었다. 이를 위한 해외 유통활동 조직으로서 무역상사의 존재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종합무역상사의 탄생은 국가적인 차원의 산업구조 고도화와 수출주도 경제체제라는 바탕 아래 기업이 효율적인 규모의 수출활동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되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자신있게 말한건대, 대우는 우리나라 종합상사의 선두주자였다. 왜냐하면 아직 종합상사 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시기에 이미 대우는 매우 열성적으로 종합상사적 활동을 해왔던 까닭이다.
대우실업은 1971년 말 대미 섬유 쿼터 시스템이 발효되면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쿼터 적용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대우는 이를 계기로 상품다양화를 통한 종합상사로서의 꿈을 실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조직개편과 함께 개발부가 신설되었다. 개발부의 신설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종합무역상사로의 첫걸음이었다. 더불어 제품개발을 통한 신규투자의 길을 모색하는데 조직개편의 필요성도 포함되 있었다.
대우가 해외지사를 늘여가고 개발부를 설치하여 수출품목 다변화를 꾀하던 1972년, 정부차원에서도 종합상사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간차원에서도 수차에 걸친 현지 조사와 이에 대한 의견이 대두됨에 따라 결국 1975년 4월 30일, 종합무역상사 설립에 관한 요령이 상공부 고시 제 10607호로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자격요건>
1. 1975년 당시 수출실적 연간 5천만달러 이상
2. 자본금 10억원 이상
3. 수출품목 수 7개 이상
4. 1백만달러 이상 수출국가 수 10개 이상
5. 해외지사 수 10개 이상
<지원제도>
1. 국제경쟁 입찰시 우선지원
2. 원자재 수입요건 개방
3. 완제품 비축구매를 위한 로칼 신용장 개설 허용 및 수출금융 지원
4. 외국환 거래은행 다수 신고
5. 보증 신용장 회전 사용
6. 수출조합 및 협회의 가입비 및 가입조건 완화
7. 해외지사의 등급을 특종으로 분류하고 해외지사의 외화 자금으로 50만달러 이상 보유 허가
정부의 자격요건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던 대우는 그해 5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을 받았다. 대우와 함께 종합무역상사 지정을 받은 업체는 삼성, 쌍용 정도였다. 창업 8년밖에 안되는 대우실업이 여타의 유수한 기업들을 제치고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됨에 따라 다시 한 번 세간을 주목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대우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을 받았다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수출 전문상사도 일약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둘째, 대우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됨에 따라 대외적으로 그룹회사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대우는 이제 개인 차원의 기업이 아닌 국가 차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종합상사 지정을 계기로 대우는 수출에 더욱 박차를 가해 매년 2배 가량의 신장세를 거듭했다. 1978년 실적은 6억 달러였으며 1979년 11억 달러, 1980년 14억 달러, 1982년 20억 달러였고, 1985년에는 30억 달러 고지를 넘었으며, 1988년에는 드디어 5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7년 후인 1995년 100억 달러 수출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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