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출산업인과 3백만 종업원은 정부의 지도와 온 국민의 성원 밑에 수출증대를 통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민족대업을 성취하는 데 헌신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서 합니다.
하나. 우리는 수출진흥이 경제발전의 첩경임을 인식하고 100억불 달성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교훈삼아 수출증대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傾注)하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 급변하는 국제무역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개척자의 자세로 기술혁신을 통하여 수출품의 품질을 고급화하고 기술집약 상품의 수출을 증대시켜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공장새마을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노사가 한데 뭉쳐 국민총화의 대열에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수출산업인을 대표하여
대우실업주식회사 대표이사 김우중
창업 4년만에 업계 2위로 부상한 대우실업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78년 제 15회 수출의 날, 영예의 6억불탑을 수상하면서 당당히 종합상사 1위를 차지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대우실업은 6억4천8백66만1천 달러(1977.11-78.10)의 수출실적으로 국내 13개 종합상사중에서 1위에 오르면서 성장 대우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 자리를 4년간 굳건히 지켰다. 세계각국이 나날이 두텁게 보호무역의 장벽을 둘러치는 가운데 이룬 쾌거여서 종합상사 1위의 탈환은 그야말로 대우 임직원의 사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선진각국이 에너지 쇼크 이후 경기를 회복하지 못한 채 낮은 성장에 머물면서 수입규제를 강화했고, 국내 제조업체들은 생산시설을 갖추지 못해 연초부터 심각한 물량부족 사태를 빚었다. 시멘트, 합판, 건축자재 등 많은 수출상품 등이 수출금지 또는 제한 명령을 받았고, 대부분의 수출업체들이 원자재 및 임금상승 등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 자금난으로 시설 및 설비확장을 제대로 못해 심한 생산능력 부족현상을 빚은 해이기도 했다. 또 선박, 의약품, 공예품 이외에는 시설규모가 적정수준에 미달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는 시장의 다변화, 제품의 고급화, 물량 및 주요시장 확보, 수입국 정부 베이스의 정책수출 적극 추진 등의 전략을 세우고 연초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탑을 쌓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차곡차곡 목표달성을 위해 매진했다.
1978년 1위를 차지하기까지 대우 수출의 가장 두드러진 전과는 뭐니뭐니 해도 중화공제품의 눈부신 진출이었다. 중화공 제품중 특히 철강제품은 77년에 비해 352.9%의 신장율을 보여 최다수출 단일품목을 기록했으며, 비료 또한 273.3%의 신장을 보였다.
또 신규 개척품목으로는 자동차, 객차, 유조선, 요트 등이었으며 플랜트 수출 기반도 확립했다. 이렇게 중화공제품 수출이 신장한 것은 물량 및 주요시장의 개척에 기인했다. 특히 동남아와 중동 등 개도국시장으로의 집중 개척, 국제입찰 적극참여, 중소 생산업체 적극지원 등의 계획을 여건이 어렵다고 굽히지 않고 밀고나간 덕분이었다.
경공업제품의 수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 또한 시장다변화 및 제품의 고급화, 다양화 추구, 신제품개발 대구매회사와의 직접제휴 등 피땀어린 노력이 세계의 보호무역주의를 뚫고 얻은 결실이었다.
1978년 한해 대우의 총수출 대상국가는 1백 6개국이며, 상품은 1천 4백 37종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시장을 심화시켜 대우의 뿌리를 깊이 내렸으며 남미지역은 차후수출의 길을 연다는 각오로 임했다.
시장확대에 따른 대우의 해외조직망도 늘어났다. 78년 당시 31개국 37개소의 해외지사에 1백 60여명의 대우가족이 주재하게 되었으며, 현지채용 인원도 2백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78년, 대우가족의 출장은 연인원 4백 99명, 1백 8개국에 9천8백78일이나 되었다. 창업주 김우중 사장의 당시 출장은 48개국을 94일간 체류했다. 그 결과는 6억불탑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에 이긴 병사가 갑옷과 신발끈을 고쳐 매고 다시 뛰듯이 대우가족은 다음해 수출목표를 12억불로 잡았다. 그리고 1979년을 대우의 기업 기반을 완벽하게 정착하는 해로 정했다. 이는 대우의 웅비를 기약하는 1980년대의 들어서는 문턱인 까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