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30년이 모두 밝고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회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불화를 대우 역시 만났다. 이 불화는 1985년 대우자동차 노사분규와 87년 대우조선노사분규라는 이름으로 불쑥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대와의 불화는 대우만의 문제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불화는 시대와 이 땅의 사람들과의 불화인 까닭이다.
당시 노사분규는 국내의 크고작은 작업장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겉으론 평화로운 작업장도 기실은 불신과 불만이 싹트고 있었다.
85년 국내 경제는 대외적으로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보호무역주의의 강화에 따른 무역환경의 악화와 국내적으로 건설, 해운, 등 부실부문의 표면화, 노사문제의 대두 등으로 투자 위축과 소비가 저조해 경제성장은 초반부터 당초목표인 7.5%를 달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경제성장 목표를 6.5%로 수정하였으나 그 에도 미달하는 5.1%에 머물렀다. 이러한 성장세 둔화에 따라 고용사정도 전년도에 비해 악화되었고 때문에 노사문제 역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안고 노사분규는 여러사업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어났다.
대우자동차 노사분규가 세간의 관심사가 된 것은 이 임금인상 투쟁이 예년과는 달랐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여타의 노사분규와는 달리 단기간 내에 공권력의 개입없이 노사간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 최초의 분규였다.
이 분규는 단순한 임금인상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었다. 1972년 6월에 새한자동차주식회사에서 설립된 대우자동차 노조는 1983년까지 분규를 도출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84년에 들어서자 노조는 군복무 기간을 근무기간 안에 넣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 또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한 요구 중의 하나였다.
회사측은 당시 이 문제를 주도한 2명이 학력을 속여 용접공으로 근무중인 사실을 알고 이들은 1984년 9월 24일자로 능력에 맞는 기술직사원으로 발령했다. 그러나 이들이 발령을 거부하고 노조활동을 계속하자 동년 12월 28일자로 해고조치했다.
이 해고조치 외에도 노조원들의 불만은 또 있었다. 그것은 노조집행부가 지난 3년간 수당인상 동결, 군복무기간의 경력 불인정 등 근로자들의 불만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교섭을 벌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 때문에 1984년 12월, 대의원총회에서 새로 구성된 대의원 40여명은 집행부가 회사와 야합했다고 주장하면서 노조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왔다.
그러나 집행부가 이를 묵살하자 1985년 1월 25일부터 독자적인 임금인상 투쟁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4월 초까지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임금인상 교육을 펴다가, 4월 9일, 비상총회를 마치고 노조위원장의 동참을 요구해 노조활동을 단일화했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 때의 분규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4월 16일 근로자 2천여명 기본금 18.7%, 근로수당, 가족수당, 품질관리수당 신설 등 제수당 14.9%, 총 33.6%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조업을 거부했다.
4월 19일 몇 차례의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노조원 3백여명이 기술연구소를 점거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4월 22일 회사측 농성에 참여하지 않은 종업원들에게 ‘가정대기’ 통보하였고, 사실상 휴업상태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경찰 1천 5백여명 회사밖에 대치하여 근로자들의 회사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4월 24일 밤 10시 15분 근로자 대표와 김우중 회장간에 극적으로 임금인상 원칙에 합의되었다.
대우자동차 노사분규는 처음으로 대규모 사업장에서 조직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노사분규를 계기로 정부와 대기업은 노사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접근하게 되었다. 즉 대우자동차 노사분규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대우자동차는 1987년, 88년, 89년, 91년 노사분규를 겪다가 1992년부터 무분규를 기록했다. 주로 인금인상으로 시작된 분규는 1988년부터 달라졌다. 노조측은 대우와 GM과의 불평등 계약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회사경영에 대한 사항을 노조가 문제로 제기한 것은 대우자동차가 처음이었다.
대우도 이미 GM과의 결별을 계획하고 준비 중이었으며, 노조측이 제기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1992년 대우는 GM의 서유럽은 2년후, 미국은 4년후 진출이라는 제약을 받아들이고 결별했다. 그리고 독자적인 모델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96년부터 연속 3기종의 승용차(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