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또 하나 대우가족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대우조선 노사분규는 1987년에 있었다. 87년의 국내경제는 수출 및 설비투자의 호조세가 지속됨에 따라 국민총생산은 12.2%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대외부채잔액이 줄어든데 따른 이자지급의 대폭감소로 적자규모가 축소된데 힘입은 것이었다.
재계는 온갖 격동을 겪으면서도 86년에 이어 2년째 국제수지 흑자기조를 지속한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달했고, 국민총생산도 1,000억달러를 넘어섬으로서 고도성장을 위한 재도약의 기반을 더욱 굳게 다질 수 있었다.
민주화과정에서 분출되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와 사회혼란, 전국적인 노사분규, 대미통상(對美通商)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의 국내시장 개방압력과 9%에 근접한 원화절상, 폭등.폭락 소용돌이 속의 증시, 높아진 경제민주화의 목소리 등 미증유의 경험속에서도 100억달러에 육박하는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부문에 따라 명암이 엇갈려 자동차, 전자, 섬유, 신발, 철강 등은 원자재가 모자라 발을 굴러야 했는가 하면, 조선, 해운, 건설 등은 여전히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노사분규가 터지자 그 대상자는 재계와 근로자로 압축되었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는 1962년부터 개발위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노사분규로 인한 경제성장 저해 요인을 공권력으로 다스려온 측면이 강했다. 이를테면 노사관계에서 사용자측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부가 떠맡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노사관계는 근로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아니라, 근로자와 정부의 관계였다.
그러나 85년부터 터지기 시작한 노사분규는 노사 양측 모두가 한단계 발전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와중에서 대우도 격렬했던 노사분규를 겪으면서 제조업에 대한 나름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관리혁명을 거쳐 세계 곳곳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는 해외에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자본만 충분하다고 하여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대우조선의 노사분규는 2년동안 극렬한 양상을 띄었다. 그 2년 동안 노사양측이 엄청난 불신으로 갈등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대우조선의 분규를 몇가지 이유로 함축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런 지 모른다. 그러니까 대우자동차도 그렇지만 대우조선의 노사분규는 복합적으로 봐야 옳다.
우선 시설공사의 장기화에 따른 투자비의 증가로 경영의 악화를 들 수 있다. 시설공사의 장기화는, 사업주체의 변경에 따른 건설기간의 연장과, 배후도시의 부재로 인한 주거환경 조성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도크(Dock) 효율성 보완을 위한 추가 시설 투자 등으로 인한 재무구조의 악화와 금융부담도 가중됐다.
게다가 1981년부터 불어닥친 조선경기의 침체로 국제선가가 계속하락하여 85년에는 80-81년 선가(船價)의 50%-60% 수준까지 하락했고, 수주물량도 심한 기복을 보였다.
또한 지속적인 임금상승으로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조선업의 채산성을 악화시켰다. 이는 노사분규에 따른 매출감소와 생산비 증가로 수지악화를 더욱 부채질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인수조건 불이행이 큰 타격이었다. 인수조건 불이행은 산업은행의 증자 지연으로 시작되었다. 대우의 옥포조선소 인수는 정부가 약속했던 산업은행과의 공동출자(대우51,산은49)와 사업다각화를 위한 종합기계 조성, 산업설비 수출기지화 및 발전설비기지화, 원자력발전 9, 10호기와 화력발전소 3, 4호기의 수의계약에 의한 턴키(Tturn key) 발주(78년 11월 경제장관회의, 79년 10월 경제장관회의) 로 이어지는 것으로 되 있었다. 그러나 80년 11월 당시 국보위는 이 인수조건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때문에 대우조선의 경영악화는 최악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미국 해운사(U.S Lines)의 도산으로 대우조선이 건조하여 인도한 12척의 컨테이너선의 건조대금의 회수가 불가능해졌다.
이런 복합적인 악제들이 어우러져 대우의 노사분규는 세간의 관심을 모으면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회사의 일지가 잘 대변해 준다.
1987년 8월 8일 노사분규 발생
8월 11일 노조설립 신고
8월 21일 무기한 휴업 발표
8월 22일 기능사원 1명 사망
8월 26일 노사분규 타결
1988년 3월 2일 단체교섭 중 12만원 기본급 인금인상 요구안 제출
4월 1일 총파업결의대회, 조합원 1명 분신기도
4월 11일 직장폐쇄 신고
4월 21일 분규타결(기본급 4만 8천원, 수당 2만원 인상 등)
9월 20일 김우중 회장 대우조선 경영정상화 문제제기
1989년 3월 27일 정부 대우조선 정상화 방안 발표
5월 18일 제1차 노사협상 개시
5월 29일 근로자 2명 분신
5월 30일 노조, 쟁의발생 신고
6월 3일 회사측 최종 임금인상안 제시
6월 7일 근로자 파업결의
7월 6일 노사간 임금협상 최종타결
지난 일이지만 대우자동차와 대우조선의 노사분규는 대우가족에게 시련을 줬지만 아울러 노사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 지 가르쳐줬다.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것만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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