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진영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소련은 다 알다시피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었다. 이렇게 되자 유럽 석양론(夕陽論)까지 제기되었고, 세계의 이니셔티브 경쟁에서 소외된 유럽 저국은 이러한 양대국 체제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대항할 필요를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의 12개국이 모여 관세동맹을 결성한 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국제화의 원천이 되었다. 또 관세동맹은 공동시장의 단계를 거쳐 현재 유럽연합 즉 EU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세계 최대의 시장을 보유한 미국은 자국 시장보다 큰 유럽연합의 결성에 자극을 받아 특히 국제적인 이니셔티브 상실을 우려해 나프타(NAFTA)의 결성을 서둘렀다. 이런 블록화의 개념이 세계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 국제화이며 그 구체적인 결과가 바로 우루과이라운드(UR)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1986년말부터 시작되었으나 100여개국이 넘는 협상 참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난항을 거듭했다. 당초 1990년말 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추진했으나 협상참가국의 이해대립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 이후 지역주의, 보호주의, 통상마찰은 계속하여 심화되었다. 1991년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상태가 지속되었고, 협상이 계속 표류할 경우 세계경제 질서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됨에 따라 1993년 7월 G7 정상회담에서 다자협상 제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1993년 12월 15일 최종결의서 및 부속협정문을 채택함으로써 7년간의 긴 협상이 종결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를 타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미국은 거대한 국력을 배경삼아 자국의 이익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국제화는 단순히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세계가 좁아지고 교역이 국제적으로 확대된다는, 눈에 나타난 현상만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국제화의 기저에는 지역경제권의 이기주의와 지역경제권 간의 힘의 대립이 엄존함을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선진국의 경제이기주의는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블록체제가 굳어질 경우 우리가 아무리 값싸고 품질이 좋은 상품을 만들더라도 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 이는 과거 국내에서 만들어 수출하던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뜻한다. 이를 타파하려면 사업의 현지화를 통해 해당국가 내에서 생산뿐만 아니라 판매, 금융, 기술개발, 인력조달 등 모든 경영활동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무국적기업, 혹은 초국적기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우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일찍이 파악하고 판단하여 창업 이래 지금껏 세계와의 경쟁을 통해 성장해온 기업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우는 세계인이 함께 만들고 세계인이 애용하며 세계와 더불어 경쟁한다는 세계경영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대우의 세계경영전략은 한마디로 말해 블록체제에 대비한 포석이다. 대우가 국제화를 시작한 시점은 일부학자들과 분석가들이 국제화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1975년 종합상사지정제도 이후가 아니라, 창업원년인 1967년 부터이다. 그러니까 대우의 세계화는 국내에 종합상사가 태어난 해로부터 8년이란 시간묶음의 앞에 있었던 것이다.
대우보다 앞선 많은 기업들이 이익이 많고 시장개척의 어려움이 적은 내수산업 부문에 군림하고 있었던 1967년 당시, 500만원이라는 보잘것 없는 자본과 5명의 적은 인원으로 이들과 경쟁하고 기업을 유지해 나간다는 건 마치 외줄을 타듯이 위험천만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 창업주는 생존전략적 측면에서 국내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재도입을 공산품 수출과 연결시켜야 된다고 구상하게 되었다. 그 구상속에는 적어도 국제시장에서는 국내 누구보다도 경쟁하여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자신감은 오랜시간 지구촌을 누비며 쌓아올린 수출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의 무한한 규모를 지닌 무역활동을 통하여 사업을 일으켰고, 그 사업은 세계경영의 시원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여건 때문에 수출이 국가의 정책목표로 제기되고 많은 지원과 배려가 계속 베풀어지게 됨에 따라, 수출중심사업을 선택한 대우가 상대적으로 무리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대우의 가장 큰 성장의 원동력은 대우가 만든 제품의 질에 있었다. 세계경영에 출사표를 던진 그해, 와이셔츠 첫 주문을 받고 원단의 선택에서부터 재봉을 거쳐 마지막 실밥을 없애는 끝마리까지 임직원은 한마음이 되었다. 숙식을 함께 했고, 즐거움은 물론 어려움도 함께 했다.
첫 출하된 와이셔츠는 고객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첫 물량의 세 배가 되는 오더를 받아낼 수 있었다. 행운을 몰고온 그 첫제품의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대우는 잊지 않고 있다. 대우가 만드는 제품은 최고의 품질이어야 한다는 그 원칙은 오늘날까지 업종을 다변화 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철칙으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음도 거기에서 기인한다.
두 번의 석유파동과 중화학전략산업으로 1970년대는 우리에게 희망과 고통과 부담을 준 시대였다. 힘에 겨운 중화학공업투자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외채도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국제화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일부학자들은 주장한다. 물론, 그말은 많다. 그러나 당시엔 몰랐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이해가 가듯이 그 시절 대우의 수출과 그 수출을 늘이려고 해외지사를 설치하고 스톡세일즈를 한 것들이 국제화 세계화의 걸음마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국내 경제의 개방정책이 점진적으로 실시되면서 한국기업의 외국기업과의 접촉시도가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특히 여러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해외투자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대우는 타기업과 비교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대우는 창업 당시부터 명운(命運)을 국제화에 걸은 까닭이다. 대우가 세계에 출사표를 던지고 비장한 각오로 국제시장이라는 전장을 향해 진군하던 1960년대말, 기업국제화 주인공들은 선진국기업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가 다국적기업이라고 명명(命名)하고 있는 기업들은 일찍이는 19세기부터 대개는 과거 수십년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여러 사업기회를 포착하여 진출하였고, 그 때 이미 자원과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와 같이 다국적기업이 선점하고 있는 세계경제 시스템 속에서 후발주자인 대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느냐는 문제 하나만도 관심을 끌만한 것이었다.
국제화란 자그마한 여러 단계의 해외진출 결정이 쌓여서 이루어진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해외시장에 대한 불활실성이 줄어들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심리적인 거리감이 가까워지게 되면, 그 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이 이루어진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 동의는 대우의 해외진출 30년이 국제화와 맞아떨어지는 까닭이다. 대우의 국제화에 들고 나간 의 첫 품목은 트리코트 지라는 옷감이었다. 그 누구도 그 옷감으로 국제화를 시작하여 매출액 55조(96년)를 달성할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는 해냈다. 와이셔츠를 팔던 대우의 직원은 세계를 항해하는 거대한 선박과 지구촌개발의 손이라 할 수 있는 굴삭기와 산업의 꽃이라는 자동차를, 인류의 고급 운송수단인 열차류를 판매하고 있다. 그밖에도 전자제품과 통신제품, 그리고 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또 폴란드의 FSO의 인수를 놓고 거대기업 GM과 당당히 겨뤄 승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우리를 한때 돈과 기술로 장악했었기에 이른바 그 일은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대우의 또다른 면은 두려움없이 시장이 있는 곳이라면 달려간다는 것이다. 한때 동서냉전으로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초까지 대우는 미수교국을 개척하며 뛰었다. 그 결과 양국의 정식국교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나라들은 하나같이 싸늘하게 얼어있거나 굳게 닫혀 있던 땅이었다. 1977년 수단을 시작으로 하여, 1978년 리비아, 1989년 알제리, 1992년 베트남과 중국, 1993년 라오스 등이다. 이들 국가중에서 리비아와 라오스는 대우와 거래를 시작하고부터 2년 후에 국교를 수립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같은 해 수교했다.
게다가 지구촌의 마지막 시장이라고 일컫는 북한에까지 대우는 국내최초로 1995년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대우는 1995년말 북경에서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 측과 약 1천 50만불에 달하는 남포 경공업사업 합영계약을 50 %의 지분으로 체결 한 후 북한당국에 합영회사 설립을 등록하고 1996년 3월 영업개시 승인을 받아냈다.
대우의 남포 경공업 합영회사의 명칭은 ‘민족산업총회사’이며 총사장은 삼천리총회사 측이, 부총사장은 대우측이 맡고 이사회는 대우측이 3명, 삼천리 측이 3명으로 구성되어 동토의 땅이라고 일컫어졌던 북한에서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족의 화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우의 북한의 진출이 꼭 이익만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타기업보다 선점의 효과도 바라고있지만, 북한이 지구촌에서 마지막시장이라는 상징성에도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화해에 대우가 앞성서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의 마음도 듣고 이해하는 이에 따라서는 심하게 비틀리어 왜곡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어느곳 보다도 북한의 진출과 그 과정을 기술하는 데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우리는 법을 지키면서 과거 미수교국으로 진출하여 정식수교를 도왔던 것처럼 대우는 북한땅에서 민족의 화해를 위해 지금 열심히 경제의 씨를 뿌릴 것이다.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 씨가 머지않은날 촉촉히 젖어 싹을 틔우고, 줄기가 되고 잎이되어 태양아래 당당히 설 수 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을. 그리하여 훗날 대우가 남북한의 화해에 작은 보탬이 되었다는 소박한 평가를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수치가 경영의 모든 우두머리가 될 수는 없지만, 대우의 세계경영은 전시나 연출용의 수치가 아니라 다듬고 다듬은 자존의 열매라는 걸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1996년 12월말 현재 해외 현지법인 227개소, 해외지사 160개소, 연구소 13개소, 건설현장 40개소, 하여 모두 430개소로 발전했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법인과 지사가 애순을 틔우고 있다. 또 해외투자는 227건에 2,161백만 달러이고, 검토중인 프로젝트도 71건에 990백만달러나 된다.
대우의 창업주 김우중 회장의 해외출장은 1967년 3회에 57일이었으나, 이듬해인 1968년도에는 5회에 54일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출장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일도 늘어났다. 1976년 15회에 일수는 141일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20회에 근접하고 일수는 200일을 웃돌았다. 바로 리비아 신화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1991년 세계경영을 다지기 위해 해외로 나간 회수는 31회에 198일이었고, 1996년는 21회에 257일을 세계경영 현장에서 보냈다.
30년동안 창업주의 총 출장기간은 약 11년 이고 총출장 거리는 9,340,243Km, 이는 지구를 약 233회 돈 거리와 맞먹는다. 창업주가 해외로 나간 이유가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문물을 접한다는 나들이성 출장이라면 아까운 시간을 내어 이런 통계를 낼 필요가 없다. 이 통계가 소중한 것은 대우의 세계경영과 창업주의 해외출장이 깊은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약관 30세에서 60이 되기까지 그는 대우의 첫 번째 손가락에 드는 세일즈맨이었다.
그가 숱한 출장과 깊은 생각을 거쳐 1993년 3월 22일 창립 26주년을 맞아 대내외적으로 천명(闡明)하면서 내세운 대우 세계경영의 개념은 <세계경영이란 경영전략의 세계화, 경영활동의 현지화를 통한 세계경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한국경제의 성장한계를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전략>이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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