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대우의 성장이력을 정리하다 보면 인수합병(引受合倂)이라는 단어가 무척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그 인수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인수당한 회사가 모두 대우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인수당하기를 희망해 왔다는 점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인수 때마다 대우의 비약적인 사세(社勢)의 확장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대우실업은 제2공장의 화재 이후 제 5공장을 전문성을 살린 일관생산 체계의 대단위 섬유공장화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나머지 4개 공장에 산적해 있던 편직 및 가공시설을 1973년 9월부터 4개월에 걸쳐 제5공장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 4월 18일, 제5공장 확장공사가 2차 준공됨에 따라 일본 도레이(Toray)사로부터 도입한 와인더기 45대, 스트레치기 12대의 신규 설치에 착수하여 3개월만인 7월 28일에 설치 완료함으로서 동양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우실업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출물량에 보다 더 기밀하게 대처하기 위해 확장을 계속하여 1975년 11월 16일에 3차 준공과 더불어 총 81개 봉제라인과을 보유하는 세계 최대의 봉제품 일괄생산체제로 변모시켰다.
니트(Knit)제품 수출로 수출기반을 확고히 다진 대우실업은 1973년 기업공개를 단행한 후 적극적인 투자활동도 전개했다. 그리하여 써클러 니트(Circular knit)제품 전문생산업체인 신성통상주식회사를 인수하였다.
1968년 1월 11일 자본금 3천만원으로 출발한 신성통상은 1972년 수출실적 600만달러를 기록함으로서 산업포장을 수상하는 등 순조롭게 성장해온 회사였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서면서 심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그것은 전년부터 일기 시작한 폴리에스터 나일론 품귀현상과 원자재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 그리고 대미 쿼터 문제 등으로 인해 수출이 갑자기 격감하여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
당시 대우실업은 써큘러 니트 생산시설이 없어 동 제품의 오더는 하청생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청생산은 문제가 많아 수출제고를 위해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성통상의 인수제의를 받은 대우실업은 날로 가열화 되어가는 국제 섬유제품 시장에서의 경쟁을 감안하여 제품 고급화와 다양화를 꾀하기 위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신성통상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대우실업은 신성통상을 인수한 후 생산시설을 대폭 확장하여 규모의 국제화를 이루면서 자본금도 10억 5천만원으로 크게 늘였다. 아울러 신성통상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체계 확립을 위해 대우실업 관리팀을 파견하여, 현존하는 제반 문제점을 개선하고 생산성 제고와 품질향상을 이룩하는 데 힘썼다. 이 결과 공장내실화는 물론 비용절감 효과를 가져와 신성통상 조기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우실업에 인수된 다음해인 1974년에 신성통상은 전년대비 79% 신장된 1,140만 달러를 수출한 데 이어, 1975년 8월에는 새마을 공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 새마을 공장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같은 해 12월 5일에는 기업을 공개했으며 연간 수출 실적은 전년대비 54% 신장된 1,750만 달러를 기록했다.
대우의 가족이 된 신성통상은 1976년 10월 15일 미국 최대의 체인스토어인 시어즈로벅(Cears Roebuck)사로부터 최우수거래업체상(Symbol of Excellence) 수상을 시작으로 1990년까지 10회에 걸쳐 이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1977년 3월, 신성통상은 수도공업주식회사의 시설과 인원을 흡수 통합하여 염가공 생산능력을 대폭 증대했다. 그리고 새로운 설비의 설치로 나염생산에도 박차를 가해 수출시장의 수요급증에 배처하였다.
수도섬유는 1964년 6월 국제염직으로 출발한 후 1971년 8월, 한일합자회사로 전환함과 동시에 상호를 수도섬유공업(주)로 변경한 회사였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2가 1번지 일대 7,400여평의 부지에 4,200여 평의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던 이 회사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참여 후 품질이 고급화되어 미국과 동남아 그리고 국내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들어 가족 중심의 경영과 노동조합의 강력한 인금인상 투쟁 등이 문제가 되어 경영난에 빠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우가 인수한 모든 회사가 그렇듯이 수도섬유 역시 대우실업에 흡수되기를 희망했다. 대우실업은 당시 미국 시장에서 나염원단을 사용한 봉제품이 대단한 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력 강화를 위해 나염시설을 완비한 수도섬유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도섬유를 인수한 대우실업은 정상화 작업에 들어가 중소기업 경영관리 특유의 모순과 타성을 과감히 불식시켰다. 대우의 새로운 경영기법과 진취적인 관리기법으로 그 모습을 일신한 수도섬유는 노사가 일체감을 갖고 회사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수도섬유는 발전을 거듭하여 국내 최대의 나염시설과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회사로 변모했다. 그러던 1977년 3월 관리효율화 및 일관생산체제 확립을 위한 재편 방침에 따라 신성통상주식회사에 흡수 통합되었다.
두 공장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대우실업은 계속 늘어나는 오더를 소화하기에 벅찬 실정이었다. 이에 대우실업은 외의류 자체생산공장 확보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유휴공장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는데, 인천에 있는 마땅한 유휴공장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 공장은 협진양행이 일본상사와 합작으로 세운 것으로서 오더가 없어 유휴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74년 4월 18일 이 공장을 인수한 대우실업은 5개의 외의류 생산라인을 설치함과 아울러 5월 3일 법인체를 설립했다. 회사의 이름은 대원섬유주식회사. 연간 코트 18만매, 슬랙스 90만매의 생산 능력을 갖춘 대우실업의 외의류수출 본격 생산기지였다.
대원섬유는 폭주하는 외의류 수출 오더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설립 다음해인 1975년 8월, 부평공단내의 대한농산 부지를 매입하여 제2공장을 신설했다.
이 회사는 1980년 1월 대우의 외의류 생산 일원화 계획에 따라 원림산업에 흡수합병되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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