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자원 개발은 1978년 3월 물자총괄본부 산하의 1개 부서로 신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자원개발은 자원빈국인 우리나라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해외자원의 적기 저가 공급을 위한 자원조사를 광범위하게 실시, 장차 상사기능의 한 분야로 정착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비록 초기단계의 자원개발이지만 대우는 그때까지의 단순 수입 방식에서 벗어나 해외투자, 융자활동을 통한 직간접 방식으로 자원보유국의 자원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필요한 자원을 개발하고, 채취하거나 또는 임가공하여 국내로 가져오는 방식을 적극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주요 개발대상 품목은 1차적으로 국내에서 생산이 안되는 에너지 자원과 (석유, 천연가스, 유연탄, 우라늄 등)부존자원이 부족하여 거의 해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무연탄과 비철금속 등이었다.
자원개발 사업은 오랜 경험과 고도의 전문기술이 필요하고 투자규모도 방대한 것이어서, 의욕만 가지고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우는 각 분야별로 전문인력을 확보하여 노력한 결과 점차 값진 실적을 쌓아 갈 수 있었다.
우선 석탄분야는, 호주의 대 광업회사인 밈(Mount Isa Mounted Holdings L.T.D Mim) 사와 함께 뉴랜드(Newland) 광산에 합자투자 개발방식으로 참여하여 여기에서 생산되는 유연탄을 한국전력의 유연탄 발전소에 장기 공급토록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 프로젝트는 1982년 6월, 연간 30-40만톤 규모로 한국전력에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케 되었다. 이 프로젝트 기본입찰은 1979년 4월에 있었으나, 각종 검토분석 과정을 거쳐 1982년에 가서야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한전의 담당부서인 연료부는 부장이 다섯 명이나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프로젝트들이 추진되었는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계약까지 체결된 상황에서도 계약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대우의 석유 사업은 1979년, 세계적인 2차 석유파동의 대비책으로 정부에서 원유도입선 다변화 및 저유황 원유 확보정책을 수립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우는 해외의 지사망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이미 1978년 동력자원부를 발족했고, 1982년 해외자원개발법 등을 제정, 공포로 해외자원개발의 법적 제도적 기반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대우가 석유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정부는 국내 민간상사에 원유도입 문호를 개방했다. 이에 대우는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회사에 원유배정 신청을 하는 한편으로 미국의 회사들과도 고유황 증질유 교환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였다.
1980년말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 한국 원유배정이 결정되었으나, 고율의 프레미엄 요구로 원유도입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대우는 1981년 4월 리비아 국영 석유판매회사(BIME)에 원유배정을 요청했다. 리비아 측에서는 동년 7월부터 원유배정을 해주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주요자원의 해외의존도가 남달리 큰 우리 경제는 1970년대말의 오일쇼크 와중에서 원유를 비롯한 해외 주요자원 확보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편승해 대우는 종합무역상사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원 보유국과의 호해원칙에 바탕을 둔 장기적인 자원확보책으로 관련 플랜트의 현지 건설을 통한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대우는 1987년 인도네시아 나웃카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해외유전개발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이후 국내업체들은 예멘의 마리브 유전에서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참담한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되었으며 대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석유기업들은 구미의 석유회사들에 비해 광구정보, 탐사기술, 자료 해석능력, 투입자금 동원능력 등 종합적인 사업수행 조건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었다. 석유 부존이 가장 많고 발견 확률이 높은 지역은 그 국가의 국영석유회사나 구미의 유수 석유개발 전문회사들이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가능성이 낮고 개발환경이 열악한 지역에서만 참여가 가능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2년 대우는, 대우가 가진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아프리카, 아시아의 후진 산유국 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통하여 원유발견 확률이 높은 유망관구를 확보하는 전략을 수립하였으며, 그 첫 번째 대상이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앙골라였다.
1992년 1월부터 3차에 걸쳐 앙골라 정부가 보유한 유망광구를 정밀검토하여 블럭-2 광구에 대한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3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앙골라 정부의 내락을 받아내었다. 그리하여 1992년 12월 마침내 운영사로 내정되었던 프랑스의 또딸(TOTAL)사와 함께 생산물분배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물리탐사 및 해석 과정을 거쳐 1994년 8월 첫 시추작업을 착수할 계획이었으나, 앙골라 내전(內戰)의 격화로 지연되었다. 이는 시추지점이 앙골라 반군의 포격 사정거리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런저런 고통 끝에 1995년말 마침내 시추에 들어가 1996년 5월 20일, 원유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1996년 4월부터 시추에 들어가 지하 3,800미터 지점에서 양질의 원유를 발견한 이후 간이생산성 시험을 실시한 결과 1일 생산량이 9천150배럴에 이르러 경제성과 생산성이 양호한 유전으로 판명된 것이다.
앙골라 유전의 경우 일반적으로 1일 생산량이 1천 배럴을 넘으면 상업성이 있다고 보고 있어,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앙골라 2-92광구 유전개발은 매장량에 대한 정밀 평가가 끝나는 대로 세부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98년 초부터 생산에 착수할 예정이다. 또 같은 광구내에 3개공을 연속적으로 추가 시추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중이다.
또 대우는, 1995년 6월12일에 페루의 육상유전 인수 입찰에 참가해 수주에 성공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유전 입찰은 페루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생산유전을 매각한 것으로, 해외의 생산 유전을 국제입찰에 참가하여 수주한 것은 국내 최초의 일이다.
이 광구의 매장량은 6천500만 배럴이며, 낙찰액은 총 1억4천200만 달러였다. 대우는 이 가운데 11.67%의 지분을 갖게된다. 함께 컨소시엄에 참여한 아르헨티나의 플러스페트롤(Pluspetrol)사와 한국석유개발공사, 유공은 각각 60%, 20%, 8.33%의 지분을 갖게된다.
이 생산 유전의 입찰 성공으로 1996년 9월부터 생산원유를 배당받게 되며, 아울러 유망한 탐사광구를 추가로 확보하게됨으로써 남미 지역에서의 자원개발 참여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대우는 세계적으로 환경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청정연료로 그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천연가스의 안정적 국내도입을 위해 러시아 동부 시베리아 지역의 사하 PNG 사업 및 이르쿠츠크 PNG 사업과, 오만, 이란, 카나다 등지에서 LNG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차세대의 주요 에너지원이 될 천연가스 사업은 20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로서 성공시, 국가적으로 자원빈국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고, 대우의 장기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원개발에 민간기업으로써 선도적으로 활동하는 대우는, 1996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굴지의 원자력 연료 전문 그룹인 코제마(COGEMA) 그룹과 핵연료 분야의 협력계약을 체결했다. 대우와 코제마의 이 계약은 국내 및 동남아시아, 중국 등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원자력 발전소용 핵연료 사업에 본격 진출하여 2000년까지 핵연료 거래 물량을 5억달러 이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으로 있다.
또한 우라늄 광산 합작 개발을 비롯하여 향후 코제마 그룹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사업분야를 다각화해 나갈 방침이다. 이번 코제마 그룹과의 협력계약은 회사의 사업 영역 확대 노력과, 향후 잠재력이 큰 아시아 시장에서의 마케팅을 강화하려는 코제마 그룹의 전략이 일치되어 성사된 것이었다.
대우무역부문은 중장기 발전계획인 「VISION 2000」에 따라 2000년까지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세계적인 물자 자원 전문상사」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우무역부문은 올해 투자 및 사업영역 확대를 통해 석유, 가스, 석탄, 우라늄 등의 에너지 자원 및 식량, 비철, 목재 자원개발에 적극나설 계획으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