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시장 개척의 선두주자였던 대우는 건설에 있어서도 두드러진 시장개척의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해외건설업에 늦게 참여한 대우는 국내업체간의 과당경쟁을 피하고 신규시장을 겨냥하여 건설수출을 수행했다.
중동건설붐이 한창일 무렵 대우는 사우디, 쿠웨이트 등 기존 국내업체들이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을 피해 해외진출의 첫 공사를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서 수주했다. 이 공사는 1,800만 달러 규모의 퀴토시 도로포장공사였는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대우의 첫 해외진출 건설공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 국내 업체로는 최초로 남미에 진출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대우의 두 번째 시장개척은 북아프리카 수단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수단은 외국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소련, 중공 등 공산국가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한은 수단의 수도 카툼에 청소년 회관을 건립중에 있었다. 일찍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한 바 있는 수단의 누메이리 대통령은 당시 한국관계자의 수단 입국을 위한 비자발급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대우는 끈질기게 교섭을 추진한 결과 마침내 수단입국에 성공, 장관급 관리 3명을 설득하여, 결국 김우중 회장과 누메이리 대통령이 단독면담을 갖게 되었다.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및 경제협력 방안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들은 다음날 누메이리 대통령은 한국과 영사관계 수립문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한국의 수단진출을 가능하게 만든 극적인 계기였다.
1977년 5월 대우는 수단의 영빈관(Friendship Palace Hotel) 건설공사를 2,000만달러에 수주하여 최초로 아프리카 건설시장을 개척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 공사는 지하 1층, 지상 12층에 148객실 규모의 수단 최고급 호텔건설공사로 7월에 착공되었다. 뒤이어 대우는 수단에 연산 25만개 생산규모의 타이어 제조공장 건설공사를 턴키방식으로 건설하는 개가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