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자동차공업에 뛰어든 것은 1978년 7월 25일이었다. 당시 한국산업은행 관리기업으로 있던 새한자동차의 한국측 지분을 대우가 인수하면서부터였다. 대우가 인수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러하듯 새한자동차 역시 뿌리깊은 부실기업 중의 하나였었다. 새나라자동차는 당시 국내 최초의 자동차조립공장을 부평에 세웠는데 이 공장이 오늘날 대우자동차의 부평공장이다.
1962년 새나라자동차란 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1965년말 신진공업사에 인수된 후 신진자동차공업(주)로 회사이름을 바꾸었으며, 1972년 다시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의 합작을 계기로 GM 코리아가 되었다.
GM코리아는 1972년 <시보레 1700>, <레코드 1900>을 생산했다. 그러나 GM코리아에서 만든 <시보레 1700>은 모델, 연료비 등에 있어서 현대의 <포니>, 기아의 <브리사>에 밀리기 시작했다. 더우기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는 자동차산업에 찬물을 끼얹어 국내 자동차 시장은 급격한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정부는 1974년 ‘5.29 특별조치’를 발표, 재벌들이 계열기업을 대폭 정리하고 기업공개를 적극 추진토록 하는 시책을 펼쳤다. 신진그룹도 정부 시책에 따라 몇몇 주력기업을 남기고 계열기업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의 보람도 없이 한국기계, 신진알미늄에 이어 GM코리아도 1976년 11월, 한국산업은행 관리기업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GM코리아의 신진측 지분을 떠맡게 된 한국산업은행은 1976년 11월 17일 GM코리아를 새한자동차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산업은행은 GM과 협조, 회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경기침체 등으로 인한 애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초위기에 직면했다. 기업경영에 경험이 없는 은행과 국내사정에 어두운 GM은 숱한 시행착오에 부딪혀 진퇴양난이 되었던 것이다.
새한자동차 경영에 한계를 느낀 한국산업은행은 몇몇 기업체에 새한자동차를 양도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선뜻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그만큼 국내외 환경과 자동차 산업전망이 불투명 했던 것이다.
새한자동차 양도문제는 난항을 거듭했고 결국 한국산업은행은 대우가 새한자동차를 인수토록 종용했다. 당시 대우는 1976년 만성적자 투성이던 한국기계(주)를 인수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반전시켜 기업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던 때였다.
대우는 새한자동차 인수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다가 국가시책에 부응한다는 대전제하에 인수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새한자동차는 대우가족의 일원이 되어 새롭게 출발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GM측이 경영권을 계속 행사하고 있어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정상기업으로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GM측으로부터의 경영권 인수와 불평등 조약의 파기가 최대관건으로 대두됐다.
신진자동차의 실패를 교훈삼아 대우는 GM과 경영권 인수를 위한 끈질긴 막후협상을 벌여나갔다. 더불어 기구를 대폭개편, 사업본부제를 도입하고 종업원의 근무시간과 급여체계를 변경하는 등 근무 분위기를 쇄신했다.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인수 1년후인 1979년에는 42억원의 흑자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