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1971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지원을 위해 전담기구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설치하고 1973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내용을 보면 중화학공업 비율을 1971년 35.2%에서 1981년에는 51%로 고도화하고 수출구조 면에서도 중화학공업 제품 비율을 1971년의 19.1%에서 1981년에는 60% 이상으로 제고시켜 1980년대의 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달러 기반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공업의 6개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입지 및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투자의 효율성을 제고키 위해 낙동강 하구에 제 2제철기지, 여수.광양 지구에 종합화학기지, 온산에 비철금속기지, 거제도 일대에 대단위 조선기지, 구미에 전자공업기지 등을 건설키로 했다.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1973-81년까지 외자 58억달러(60%), 내자 38억달러(40%)등 합계 96억달러로 계획했으며 소요자금 조달은 자기자본 30% 이상, 외국인 투자비율은 50% 이하라는 원칙을 세워 투자의 건실성을 기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부의 중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추어 대우도 1973년부터 적극적인 중공업 진출을 시작했다. 그 첫번째 사업으로 1973년 6월 22일, 당시 드레스 미싱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졌던 동국정밀기계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해서 상호를 대우기계주식회사로 바꾸고 각종 재봉기를 생산, 국내외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대우기계는 1973년 11월, 국내재봉기 업계 최초로 KS마크를 획득하고 월 1만여대의 재봉기를 생산, 대부분을 영국, 중동 및 동남아시아로 수출해서 1974년 2백여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대우기계 발족을 계기로 우수한 엔지니어들을 뽑아 현장에 배치하여 실무에 바탕을 둔 기술인력으로 양성해 나갔다. 이들은 결국 대우의 중화공분야 본격진출시 대들보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노력에 힘입어 회사는 생산 판매에 있어 괄목할 만한 신장을 기록했다.
대우기계의 이러한 성과는 이란, 아프리카, 동남아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마케팅 활동이 적중한 결과였다. 일본이나 유럽제국의 재봉기공업 사양화에 따라 수출전망이 밝을 것으로 판단한 대우는 1974년 본격적인 사업확장을 단행하는 한편 생산공정 합리화로 제조원가의 적정화와 철저한 경영합리화를 도모했다.
이에따라 1974년 자본금이 10억원으로 늘어난 대우기계는 매출 8억 5천만원, 순이익 900여만원의 영업성과를 올렸고 수출 115만 달러(전년대비 378% 증가)를 기록함으로써 인수 당시의 경영불합리를 과감히 제거하고 정상경영 궤도에 진입하게 되었다.
1974년 들어 정부가 경남 창원지역에 대단위 기계공업단지를 건설, 기계공업을 본격 육성키로 함에 따라 대우기계주식회사는 2만여평의 부지를 확보, 1975년 1월 4일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8월 부분적인 완공을 보았다.
대우기계 창원공작기계 공장은 1976년 9월부터 가동에 들어가 일부 공작기계를 생산, 기계공업 사업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지속적 성장, 수출다각화 및 국민적 기업으로서의 기반 정착화를 위한 전진기지가 될 새로운 주력사업 육성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정부가 강력히 추진했던 수출지향적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산업재편성에 능동적으로 참여, 1976년 2월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중공업 부문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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