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한국기계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6월,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기계공업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공장이었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전환된 후 1942년에 주물, 주강, 단조, 압연시설을 갖추고 200톤급 잠수함 14척을 건조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 전쟁물자 생산에 동원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사에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개시되기 전, 일본의 소형잠수함 한척이 미군에게 나포되는 부분이 기술되있다. 미국은 이 잠수함의 제조처를 알기 위해 일본 전역과 해군자료를 샅샅히 뒤졌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훗날에 가서야 이 잠수함이 한국에서 제작된 것임을 밝혀내었는데, 이 잠수함이 대우중공업(주)의 전신인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정부에 귀속된 조선기계제작소는 1946년 10월 상공부 직할공장 → 1949년 1월 국방부이관, 해군관리 → 1949년 11월 상공부이관 → 1951년 5월 국영기업체 → 1952년 1월 상공부와 국방부 공동관리 → 1955년 8월 국방부 이관, 해군관리 → 1961년 상공부이관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1963년 5월 20일, 혁명정부의 공업화정책에 따른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법’에 의해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고 국영기업체로 재발족 되었다. 그러나 4반세기를 계속해온 비능률과 경영부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68년 9월, 그당시 자동차 사업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신진자동차주식회사에 인수, 민영화되어 또다른 차원의 재건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기계는 신진자동차가 경영에 참여한 이래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종합기계 공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우선 1969년 정부로부터 디젤엔진공장 실수요자로 선정되어 공장건설을 위한 수년간의 준비작업 끝에1973년 3월 착공한 디젤엔진공장은, 서독 재정차관 및 상공차관등 25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 1975년 5월에 완공을 보게되어 양산체제 기반을 마련했다.
또 1973년에 부곡차량주식회사를 인수 합병한 철도차량 공장은 2단계 시설투자를 집행, 완성단계에 이름으로써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기계는 개별주문 방식에 의한 소량다품종 생산체제로 원가 부담가중, 수주물량 부족의 부실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디젤엔진공장 건설에 따른 막대한 자금부담으로 회사 재무상태는 날로 악화되었고 임금도 제대로 지급치 못해 종업원들은 근무의욕을 상실하고 영업과 생산 활동이 지극히 부진하여 회사는 위기에 직면했다.
여러 부실요인이 겹친 한국기계는 끝내 경영정상화의 길을 걷지 못한채 1975년 7월, 한국산업은행의 전면 관리회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업은행 관리회사가 된 한국기계는 정부의 재무구조 개선책의 일환인 ‘한국기계공업(주) 정상화조치’에 따라 그 당시 산업은행 및 시중은행이 한국기계에 대출한 금액을 출자금으로 전환토록 하였다. 그 결과 1975년 8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친 증자를 통하여 33.2억원의 자본금을 120억원으로 증가시킴으로써 재무구조를 부족하나마 개선할 수 있었다.
2차례에 걸친 증자를 통해 한국기계는 어느 정도의 금융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고, 재무구조도 개선되었으나 회사의 경영상태는 피관리회사가 갖는 특유의 방만과 무질서에 빠져있었다. 회사가 언제 누구의 손에 들어갈 지 모른다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종업원들의 근무태도는 안이하고 무책임한 상태였으며, 영업과 생산활동은 극히 부진하여 한국기계의 경영부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어만 갔다.
그리하여 중화학공업 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각적인 지원시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부는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한국기계를 인수하여 정상화 시킬수 있는 능력있는 민간기업을 물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은 기계공업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섣불리 참여 했다가는 모기업 마저 도산할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인수를 기피했다. 1975년말, 대우실업주식회사는 정부로부터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인수를 외면한 한국기계 인수 제의를 받았다. 대우는 섬유류등 경공업 제품 위주에서 오는 수출신장의 한계, 중화학공업 수출상품 확보, 기계공업 개척의지등 내부적인 문제와 함께 민족적 자산인 산업설비를 사장시킬 수 없다는 사명의식 때문에 마침내 한국기계의 인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기계 인수를 결정한 대우는 인수를 위한 실무작업반을 편성, 경영상태와 재무구조 및 재고자산 현황에서부터 관리체계, 영업활동과 인력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조사작업에 착수했다. 인수작업반의 광범위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대우는 한국기계의 경영정상화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업계의 지대한 관심속에 1976년 2월부터 한국기계 경영에 직접 참여했다.
대우는 같은달 26일 주주총회를 계기로 산업은행의 지분을 포함한 한국기계 전 주식의 48%를 취득, 명실상부한 대주주가 되었다. 인수 당시 한국기계 부채총액은 대우 총자본의 거의 3배에 달하는 797억 4천만원으로서 대우가 이런 회사를 인수 했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을 업고 뛰는 격이었다. 따라서 국내의 관심은 ‘대우가 과연 한국기계를이끌어 나갈수 있을까?’, ‘한국기계 인수 때문에 대우마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에 집중되어 있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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