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말 산업기계공장의 시설을 재정비하여 지게차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한데 이어, 당시 중동지역 건설붐과 국내 건설사업의 활기에 힘입어 1977년 2월 일본의 히다찌(Hitachi)사와 굴삭기 및 유압 크레인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12월에 생산공장을 완공하여 산업기계공장의 지게차사업을 중기사업에 흡수, ‘중기사업본부’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967년 일본 고마쭈사와 기술체휴로 생산하게 된 지게차와 굴삭기를 주축으로 중기사업에 본격 참여하게 된 대우는 이를 바탕으로 종합 건설중장비 사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77년말부터 세계 최대의 건설중장비업체인 미국의 캐터필러(Caterpillar)사와 불도저(Bulldozer), 로더(Loader), 트랙터 등 각종 건설중장비 부문에 대한 기술 및 수출협력계약 체결을 추진, 1978년말에 정식으로 서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외 협력관계를 추진하는 한편 회사는 이미 확보해둔 창원기계공업기지 내의 성주단지에 대규모 종합건설중장비 전용 생산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1978년 4월에 건설본부를 신설하고 일본의 히다찌(Hitachi)사 및 고마쭈(Komatsu)사와 최신식 종합건설중장비공장 건설을 위한 용역계약을 체결, 건설중장비사업을 본격적으로 확대 추진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8년 2월에 DH04-2(13톤)생산 시작을 기점으로 4월에는 DH07-3(20톤)을 생산, 그해 국내 총 수요 195대중 141대를 판매하여 시장점유율 72 %의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설중장비사업의 확대 추진은 1979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에 의해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학공업은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과 민간기업의 경쟁적인 참여로 급속한 성장을 나타냈다. 그 결과 1979년에는 공업구조면에서 중화학공업이 경공업을 앞질러 중화학공업화 비율이 51.2 %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복․과잉투자가 가장 큰 문제로서 투자규모의 경제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또한 짧은 기간 동안 중화학건설이 이루어지다보니 금융능력, 기술능력, 인력공급능력, 부품공급능력 등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석유파동과 세계경제의 불황까지 겹쳐 중화학부문은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경제 안정화 시책의 일환으로서 1979년 4월 제 1차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1차 조정내용을 살펴보면, 대우중공업의 중장비 제작을 위한 캐터필러 (Caterpillar)사로부터의 기술도입 인가는 잠정적으로 유보시켜 이 분야의 투자계획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캐터필러 (Caterpillar)사와의 건설중장비 협력사업은 회사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창원 성주단지의 건설중장비 전용 생산공장 건설사업도 보류된 상태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