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옥포조선소 건설공사 착공과 중단
우리경제는 1963년부터 추진된 5개년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1, 2차 5개년 경제개발 기간 중에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과 섬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 시설의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여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수출주도 경제체제를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1차 산업과 경공업만으로는 계속적인 경제성장과 수출즐대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1973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에서는 우리경제의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기계, 자동차, 조선부문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시책에 따라 1973년 5월, 초대형 조선소인 ‘옥포조선소’의 건설계획을 확정,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73년 10월, ‘대한조선공사’를 사업주체로 하여 총소요자금 약 1,030억원을 투입, 총부지 100만평에 신조용 100만 DWT급 도크 1기, 15만 DWT급 선대 1기, 50만 DWT급 수리도크 1기를 중심으로 하는 옥포조선소 건설공사가 착공되었던 것이다.
옥포조선소 공사 착공 직후인 1973년 말에 일어난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높은 인플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업주체인 대한조선공사는 옥포조선소 건설의 기술용역을 맡은 영국의 A&P APPLEDORE 및 T.F. BURNS와 합의, 신조선과 수리조선 중심의 옥포조선소 레이 아웃을 현재와 같은 신조선, 수리조선 및 산업플랜트를 복합 생산할 수 있는 다목적 조선소로 변경하였다. 이런 레이 아웃 변경과 함께 인플레 등의 요인도 작용하여 소요자금도 1,500억원으로 늘어났다.
조선경기의 활황과 정부의 강력한 중공업 육성시책에 따라 착공된 옥포조선소는 1973년 말에 일어난 오일쇼크로 큰 위기를 맞게되었다. 즉,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침체됨에 따라 그동안 활황을 보이던 조선경기도 급격히 침체되고, 옥포조선소와 같은 대단위 조선소 건설의 필요성과 경제성에 대한 논란까지 일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사업주체인 대한조선공사는 조선소 건설 후의 수주물량 확보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국내․외로부터의 건설자금 조달이 어려워 공사진척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 옥포조선소 건설공사는 1976년부터 사업성과 건설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건설공정 30 % 상태에서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조선시황의 불황으로 옥포조선소 건설공사가 중단되자 정부와 사업주체인 대한조선공사는 옥포조선소 전체의 사업성 검토를 다시하는 한편, 이와 함께 건설공사의 재개여부도 신중히 재검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성 검토과정에서 조선불황기에 대단위 조선소 건설의 경제성도 의문시 되었으며, 또한 사업주체의 자기자금 조달에도 문제가 많아 정부에서는 옥포조선소 건설중단을 해결키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부의 방안강구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대책으로는,
첫째, 옥포조선소 건설사업을 포기하고, 기 조성된 100여만평의 부지를 중소기업용의 기계공업 단지화하여 분할 분양하는 방안,
둘째, 옥포조선소 건설사업을 포기하고, 일부 구축된 방파제와 도크를 이용, 원유비축기지로 활용하는 방안,
세째, 옥포조선소 사업주체를 자금조달 능력과 경영능력이 뛰어난 업체로 변경하여 조선소 건설을 재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