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에 의한 옥포조선소 건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다 40만평을 매립하고 육지 80만평을 정지하여 총 120만평의 대단위 조선소 부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광활한 갯벌 120만평을 개척하는 대단위 토목공사와 건설공사로 수많은 불도저와 덤프트럭의 굉음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직원들은 모두 작업복 상의 왼쪽가슴에 ‘나는 옥포건설의 기수다’라는 글을 새겨 붙이고 개척자의 꿈을 키웠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거북선으로 왜선 40여척을 격침시킨 유서깊은 옥포만의 지도는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한국의 기수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하나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우 ITT가 설립됐고, 각종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했으며, 하역안벽, 하역크레인, 강재적치장, 주변전실, 훈련소 등을 준공했다. 공장등록 및 조선업 등록과 함께 대한조선학회에도 가입했다. 대우조선 최초의 해외지사인 노르웨이 오슬로 지사도 개설했다.
회사 설립한 지 꼭 1년째 되던 날인 9월 26일, 노르웨이 WESTFAL- LARSEN사로부터 22,500톤급 화학제품운반선 4척을 척당 4,540만불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12월에는 플랜트 첫 수주제품인 제철화학의 카본 블랙(Carbon Black) 플랜트를 수주하였다.
창립 1주년 때는 건설공정율 70 %를 기록했다. 1978년 10월 1일 옥포 현장 인수 당시, 1973년부터 계속되어온 공사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 위에 건물이라곤 소조립공장 하나만 덩그렇게 놓인 채 건설공정 30 % 밖에 안된 것을, 대우가 공사를 재개한 지 1년만에 70 %까지 건설공정율을 끌어올린 것이었다.
1980년은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혁과 더불어 유래없는 고도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던 우리나라 경제마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어려움에 봉착한 해였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대우조선만은 과감하고도 꾸준한 대규모 시설투자를 계속하였다. 3월에는 서울본사가 옥포로 이전하면서 이제까지의 건설체제에서 건설․생산 병행체제로 돌입하였다. 1,500억원 이상을 투입하여 1도크 게이트를 비롯, 절단공장, 선수미공장, 산기공장, 전처리공장, 판넬공장, 산소공장, 아세틸렌공장, 정비공장, 시험측정실 및 훈련원을 준공하였고, A안벽과 B안벽을 축조했으며, 이밖에 JIB 크레인 및 타워 크레인도 속속 설치하였다. 두번째 해외지사인 영국 런던지사와 세번째인 미국 LA지사가 설치됐다.
9월 1일에는 첫 프로젝트인 2001호선의 역사적인 강재절단을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생산활동이 시작됐고, 대우중공업의 산업기계영업본부 인수 및 옥포이전이 추진돼 산기프로젝트 제작도 착수됐다. 조선소 건설공사가 한창임에도 영국 벤(BEN) 해운사로부터 대우조선 최초의 B/C인 14만톤급 살물선(1001호선)과, 노르웨이 앤더스(Anders)사로부터 12만8천톤급 셔틀 탱커(Shuttle Tanker, 5001호선)을 수수한 것을 비롯, 미국 R&B사로부터는 반잠수식 시추선(Semi-Sub. Drlling Rig) 1기(3001호선)를 국내최초로 수주하는 등 대형상선, 반잠수식 시추선 등 각종 일감의 수주소식은 계속됐다. 필리핀 아구스(Agus) 다목적댐 수문공사를 비롯한 산기공사 18건과 울산화력 하자보수 등 발전부문에서도 수주가 계속됐다.
한편, 1980년 11월 정부는 1978년 인수 당시부터 옥포조선소의 조기정상화를 위해 지원키로 약속했던 발전설비부문을 정부사업으로 계속 추진함에 따라 옥포종합기계공단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 되었고, 옥포조선소 조기 정상화 기대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금 출자는 계속돼 대우그룹이 506억원, 한국산업은행 449억원 등 총 955억원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