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기 분야에서 도약의 기반을 다진 대한통신공업주식회사에 대우그룹이 자본 및 경영에 참여를 하게 된 것은 1980년 4월부터이다. 80년 4월 4일 대우에서 주식지분 50 %를 인수하여 자본과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우는 1980년 5월에 다시 5억원을 증자, 총 자본금은 36억 6천만원이 되었다. 전자사업분야로의 사세확장을 위하여 우수한 전자업체이던 오리온 전자공업주식회사를 합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1980년 10월 정부의 제2차 중화학 투자조정으로 1979년 11월에 지정되었던 국설교환기(ESS) 생산업체 지정이 취소되었고, 1980년 12월에는 대우센터빌딩에 서울지점을 설치하였으며 후일 첨단기술의 산실인 대우통신 종합연구소의 모체가 되는 대한통신 신규사업과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1981년 1월 현 주안공장 자리인 인천시 서구 가좌동 531-1번지로 본점을 이전하였다. 꾸준히 사세를 확장해 나온 대한통신은 다가올 고도산업정보화 사회의 통신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계식 교환기에서 전자식 교환기로 이행되어 나가는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1982년 1월 국내 최초로 캐나다 노던텔레콤 사와 음성 및 데이터 겸용 교환시스템인 SL-1 전전자식 사설구내교환기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6월에 인가를 받아 연구개발에 착수함으로써 기계식에만 의존하던 국내교환기 시장에 전전자식 교환기 개발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SL-1 교환기 기술도입을 계기로 첨단 기술분야에 대한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점차 중요하게 대두됨에 따라 1982년 7월 기존의 신규사업과를 중심으로 각 부서별로 흩어져있던 연구개발 인원을 모아 대한통신공업주식회사 종합연구소를 발족시켰다. 덧붙여 보다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2년 12월 45Mbps 단파장 멀티모드용 광통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1983년 3월 15일에는 대한전선측이 소유하고 있던 대한통신 주식잔여분을 대우측에서 전량 인수하였고 5월부터는 꿈의 통신, 빛의 혁명이라 불리는 광통신시스템 생산을 개시하였다.
1983년 5월에는 증자를 하여 자본금은 55억원이 되었고 6월에는 대우전자(구-대한전선)에서 OA사업부 및 반도체 연구소를 인수, 반도체와 컴퓨터 등 첨단산업부문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캐나다의 노던텔레콤사와 광통신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최첨단 기술인 135Mbps 장거리 전송용 광통신 시스템 기술을 도입하였다. 또 종합연구소에 DP연구부, 반도체, HYBIRD IC연구부를 통합, 미래를 대비하는 최첨단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종합연구소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대우는 1983년 9월 1일, 전송장비 생산업체 광진전자공업주식회사를 흡수 합병하고 증자를 단행하여 자본금을 85억원으로 늘렸다. 그리고 상호를 대우통신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렇게 오늘의 대우통신은 탄생되었다.
광진전자공업주식회사는 1969년 12월 박영효씨가 자본금 5억원을 가지고 설립, 반송통신기계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회사였다.
그후 1975년 11월 일본 후지쓰(FUJITSU)사와 반송통신장비 S-60M 기술도입계약 및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1976년 5월에는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대야리 산 9-1에 공장부지를 매입 그해 12월에 제 1공장을 신축 완공하였다.
그리고 1977년 12월과 이듬해 10월에 각각 5억원씩 증자하여 자본금은 15억원으로 늘어났으며 1978년 12월에는 제 2공장을 신축하고 사세를 확장해 나가다가 1983년 9월 대한통신공업주식회사에 합병 되었던 것이다.
대우통신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후 회사는 1983년 10월 1일 (주)대우의 시스템사업부를 인수하여 대형컴퓨터시스템 판매에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또 1983년 6월3일에는 노던텔레콤 사와 광통신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하고 최첨단 기술인 135Mbps 장거리 전송용 광통신시스템 기술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종합연구소에 DP연구부, 반도체, 하이브리드 아이씨(HYBRID IC) 연구부를 통합 미래를 대비하는 첨단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연구소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6월 29일에는 전송장비 전문 생산업체인 광진전자(주)와 합병하였다.
대우는 덧붙여 그해 7월 8일 정관을 일부 변경, 수출입업을 사업 경영 목적에 추가하였으며, 6월 1일부터 15일까지 KTA 주최로 코엑스(KOEX) 전시장에서 개최된 세계 통신의 해 기념 전기통신전시회에 대한통신과 광진전자가 대우가족의 이름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대우통신은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84년 2월,국내 최초로 PC를 이용한 네트워크 개발에 성공하였다. 같은날 반도체부문으로의 사업영역 확장을 위하여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구미 반도체시설 지명 경쟁에서 낙찰되어 반도체 사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84년 3월에는 캐나다 노던텔레콤사와 최첨단 전송장비인 DE-4E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단시간내에 국산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국내 전송망의 디지탈화에 기여하였다.
그 결과 생산기술과 품질의 안정성을 크게 인정받아 1억5천만달러의 장기 수출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국내 통신기 제조기술의 발전사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DE-4E 채널뱅크는 음성처리 기능뿐만 아니라 방송서비스 및 데이타 전송과 기존 전송선로의 용량을 늘리기 위한 트랜스코드 기능까지 갖춘 첨단 전송장비로 동축케이블, 마이크로웨이브 및 광섬유 케이블과 접속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수입대체 효과 및 수출 증대에 역수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으며, 1984년 4월에는 대우반도체(주)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84년 6월에는 외국인투자로 자본금이 100억원으로 늘어났으며, 국산 전전자식 교환기(TDX) 사업에 참여하여 국설교환기 생산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도약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꿈의 전송로로 불리는 광케이블 공장을 준공하고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갔으며, 자체 기술진에 의해 개발에 성공한 16비트 PC의 원활한 업무진행을 위해 ‘프로젝트 Q’라고 명명된 PC프로젝트팀을 발족하여 16비트 PC 생산 및 수출계획을 전담 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첨단 전송장비인 DE-4E 수출계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984년은 대우통신이 회사 성장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한 한 해였다. 교환기, 통신기, 컴퓨터 및 주변기기, 광통신, 반도체 부문등으로 사업영역을 대폭 확대하였으며, 이러한 결과로 매출액은 322억원에 이르러 전년대비 120 % 정도 증가되었다. 그리고 당기 순이익은 15억원으로 전년대비 190 % 이상 신장 되기도 하였다.
대우통신은 1985년 4월엔 TDX-1 양산모델을 관련기업중 최초로 생산에 성공하여 ETRI 내에 설치하였으며, 6월 28일에는 16비트 PC 모델-D를 미국에 대량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5월엔 모델-D 수출 10만대를 돌파하였다. 이 제품은 국내시장에서도 PRO-2000 이라는 모델명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
PRO-2000은 일본 후지쯔 사와 기술제휴해 생산하기 시작한 16비트 사무용 워크스테이션 9450-II와 함께 매출증대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일본 산요(Sanyo) 사와 DF-10 팩시밀리 기술도입 계약을 맺어 팩시밀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84년 8월 대망의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된 이래 시제품(Proto Type) 생산에 있어서 후발업체의 불리함을 딛고 국내에서 최초로 1985년 3월 9,600회선 용량의 TDX-1 시제품 2시스템을 개발 완료하였는데, 이는 세계에서 10번째 전전자식 교환기로 기술력의 뛰어남을 인정 받았다. 고령․횡성․임실․철원 등의 지역에 성공적인 설치 및 운용을 완료하였으며, 1986년 10월에는 필리핀 정부와 국내에서 최초로 4만회선 2천4백만달러 상당의 수출 기본계약을 맺음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6번째 전전자교환기 수출국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 1987년 4월에는 북미방식은 물론 유럽방식(CEPT)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2만회선 용량의 TDX-1E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향후 수출가능성을 한층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986년 3월엔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90억 상당의 시설투자를 완료하여 구로 반도체 공장을 1987년 2월에 완료하였다.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반도체공장은 구 세계물산 건물을 개증축하여 반도체 생산 시설을 갖춘 것으로 초기에는 바이폴라 제품이 생산되었으며, 2년뒤인 1989년엔 CMOS 라인이 새로 설치되었다.
이러한 16비트 모델-D의 수출호조와 국설용 전전자식 교환기 TDX-1의 본격적인 공급 등에 힘입어 ’86년도 매출액은 1,330억원으로 전년대비 100 % 성장하였다.
그 결과 동년 10월 수출 5천만불탑을 수상하였으며, 11월에는 100억원을 증자 자본금이 200억원으로 늘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