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대우투자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된 1973년 7월 3일은 대우 성장사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날이었다. 대우투자금융은 대우가 소유가 첫 번째 금융회사라는 점외에도, 창립 이후 인수를 통하지 않고 직접 설립한 첫 회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회사였다.
그러나 대우투자금융이란 명칭은 설립 때부터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제일투자금융이란 이름으로 설립 등기된 후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동양투자금융으로 상호가 변경됐는데, 이후 14년간 쓰이다가 87년 9월 24일 을지로 독립사옥 신축(舊원림빌딩 자리)과 함께 대우투자금융으로 바뀐 것이다.
60년대의 고도 성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은 너무나도 협소했다. 관치금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데다 자금 흐름이 유연하지 못해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건전치 못했으며, 고리사채로 인한 금융비용 과다지출 등으로 기업부실화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2년 8월 3일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이라는 이른바 8․3조치를 단행하여 기업체질 강화 및 사금융시장 양성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그동안 낙후되어 있었던 금융시장 기능을 제고함으로써 자금흐름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단기 금융영업,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하였다.
이처럼 사금융을 제도금융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나타나자 함병선 등 15명의 발기인은 1973년 2월 10일 가칭 제일투자금융(주) 설립에 착수, 3월 21일에 재무부로부터 설립내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내인가 과정에서 금융기관으로서의 공신력 재고를 위해 단기 금융회사 납입자본금이 당초 5억원에서 10억원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순수 민간인에 의한 10억원 자본금의 출자 및 주주 구성문제가 쉽지 않아 회사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은 중단되었다.
한편 당시 수출산업을 주도하며 짧은 역사에도 불구, 국내 재계의 정상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대우실업은 막대한 자금수요 때문에 금융산업 진출을 절실히 요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우실업은 1968년 7월 10일 외자도입법에 의해 쿨리지 2세(T.J. Coolidge JR.)가 설립하여 중장기 투융자업을 영위해 오던 한국투자(주)와 협력아래 외자도입, 여신업무, 리스업무, 투자신탁, 팩토링 등 직간접 금융업무를 종합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순수 민간 종합금융기관 설립을 주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73년 5월 재무부로부터 단기금융회사 설립에 관한 제의를 받은 대우실업은 설립준비 작업이 중단상태에 있던 제일투자금융(주)의 내인가 사항을 그대로 승계 받기로 했다. 대우는 우선 한국투자(주)와 합작투자에 의한 단기금융회사 설립을 결정하고 회사설립에 돤한 제반업무를 본격적으로 마무리짓게 되었다. 이어 1973년 7월 2일에는 새로 구성된 발기인단이 회사설립시 발행주식 전부를 인수하고 설립자본금 10억원을 전액 납입 완료함으로써 회사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을 매듭지었다.
7월 3일에는 회사설립 등기를 완료했으며, 7월 18일에는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 회사 명칭을 제일투자금융(주)에서 동양투자금융(주)로 정식 변경하고 8월 6일 영업을 개시했다. 이로써 유휴 민간자본을 산업자금으로 동원하고, 기업에 단기 운영자금을 공급하여 기업의 건전한 발전과 더불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코자 설립된 동양투자금융은 비로소 새로운 민간금융 기관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단 하루를 맡기셔도 높은 이자를 드립니다” 라는 단자회사 특유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동양투자금융은 그 당시 단자회사에 대한 많은 제약조치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영업실적 신장을 보였다. 1974년에는 총수신 239억200만원, 총여신 237억 9,400만원의 실적을 보였고 1975년에는 1974년에 비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영업실적을 기록했다.
또한 설립당시 10억원 이었던 납입자본금은 1974년 3월에 3억원, 7월에 2억원, 12월에 2억원을 각각 유상증자 함으로써 1974년 말에는 17억원이 되었고, 또 1975년 2월 주주총회에서 수권자본금을 30억원으로 증액하면서 다시 3억원을 유상증자, 총 납입자본금이 20억원에 이르게 되었다.
동양투자금융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금융기관으로서의 공신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공개와 자본금 대형화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75년 6월, 10억원을 공모 증자하여 공개기업 요건을 갖춘 후 회사 주식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함으로써 단기금융업계 최초로 자본금 30억원의 대형 공개법인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또한 초창기의 경험을 거울 삼아 신규 수신의 개척, 우량적격 업체 유치, 대고객 서비스 향상 등에 주력함으써 1976년 4월 3일에는 여수신 공히 500억원을 돌파했고 10월 20일에는 업계 최초로 600억원을 넘어서는 등 급성장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여수신 실적이 1,000억원을 넘어섰고 1981년에는 무려 4,000억원을 돌파하여 개업 초년도에 비해서 약 60배라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 앞서가는 단기금융 회사로서의 진면목을 과시했다. 이러한
발전으로 1981년 10월 26일 제18회 저축의 날에는 단기금융업계 최초로 재무부장관으로부터 최우수 저축기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업규모가 비약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1978년 5월에는 금융쇄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각종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감사실을 신설, 기획부로부터 업무를 인수받아 내부감사 주관 및 외부감사, 수검과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 1980년 10월에는 안전관리실을 신설하여 경비, 보안 및 안전 업무, 비상종합업무계획의 수립 및 통제에 관한 업무를 전담케 함으로써 기구는 5부 2실 5과로 확대되었다.
창립이래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해오던 단기금융회사들은 1982년에 들어 외부로부터의 도전과 시장여건의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저금리, 저성장의 안정기조 위에서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연초부터 5차에 걸쳐 금리가 인하되었고 특히 6․28 경제활성화 조치로 은행과 더불어 단기금융회사 금리가 일시에 4~6% 인하됨으로써 충격과 함께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이런 가운데 1982년 5월의 이른바 장영자․이철희 사건으로 불리우는 거액어음 사기사건은 기업 재무구조의 취약점 및 엄청난 사채시장의 규모, 금융산업 낙후성 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기업어음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여 사채시장은 물론 단기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은행에 이르기까지 금융시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1982년 7월 3일, 사금융의 제도금융화를 목적으로 실명거래제 실시를 발표하고 이어 단기금융회사 및 상호신용금고 신규설립 허용과 신용관리기금 설치 등을 골자로 한 제2금융권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따라 신설 단기금융회사 10개사를 설립인가 하고 같은해 8월에는 서울지역 은행들로 하여금 상업어음 매출, 팩토링, 상호부금, 신탁, 국공채인수 등의 업무를 취급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은행의 겸업 경영제도(universal banking system)를 도입함으로써 제2금융권에서는 방대한 자본금과 조직을 가진 은행과의 힘겨운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82년 이후 밀어닥친 단기금융 업계의 전환기를 맞아 업계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양투자금융은 이를 보다 커다란 성장의 계기로 삼고자 1982년 8월에 25억원의 유상증자 및 이익준비금 일부와 기업합리화 적립금 일부를 자본으로 전입함으로써 25억원의 무상증자를 실시하여 납입자본금을 200억원으로 증대시켰다. 이어 1984년 8월에 50억원의 무상증자를 실시하고 같은해 9월에 또다시 50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함으로써 납입자본금 300억원의 초대형화된 비은행 금융기관으로 성장함과 아울러 현대적인 단기금융 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동양투자금융은 87년 9월 24일 을지로에 총건평 8천477평에 15층 규모의 산뜻한 새사옥을 마련하고, 상호도 대우투자금융으로 바꾸는 등 사세확장의 디딤돌을 튼튼히 갖춰나갔다. 그러나 88년부터 제기된 대우조선 정상화 문제는 대우투자금융의 진로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몰고갔다. 즉 대우조선 정상화 조치의 일환으로 대우투자금융 매각 조치가 내려졌으며, 결국 대우투자금융은 바삐 달려온 17년을 뒤로 한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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