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대우가족의 일원으로 면모를 일신한 동양증권은 공신력 제고와 사세확장 이라는 대전제 아래 10회에 걸쳐 증자를 단행, 납입자본금을 50억원으로 늘려 동업계내에서 상위 증권회사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와 더불어 증권회사의 공신력을 강화하고 기능을 제고시키기 위한 증권회사 대형화 계획이 1975년 4월, 정부에 의해 추진됨에 따라 증권회사 대형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양증권도 기업을 공개한다는 방침 아래 9월에 5억원을 공모증자하여 납입자본금 20억원의 대형증권회사로 체제를 정비하고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0년대 중반 우리 경제는 중동에 진출한 해외건설 및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고무된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으며, 이에따라 증권시장도 기업공개 촉진으로 인한 상장주식수 증가와 유통시장에서의 매매증가로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 대형화하여 공개된 증권회사에 대해서는 명의개설 대행업무허용, 기금식 증권저축 업무 인가, 인수업무에 있어서의 간사자격 우선권부여, 자산운용준칙의 적용완화 등 유리한 특전이 부여되었다.
그 결과 1983년 중반부터 증권회사 대형화 바람이 불기 시작해,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증권회사를 거느렸지만 자본금 규모는 20-50억원 규모가 대부분이었으며 큰 회사라고 해도 80억원이 최고였다. 1976년 이래 1982년까지 증권회사들의 연간 자기자본 이익율은 최고 13.9%(1981년)를 넘어서지 못했다. 수지가 안맞아 대기업들은 선뜻 출자를 꺼렸고, 자본금이 영세하고 경영도 미숙하여 창구사고가 빈발, 공신력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증권회사의 대명사였던 삼보증권의 침몰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삼보증권의 침몰은 한편으로 우리나라 증권사의 대형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 즉 일부 증권회사들은 이 기회에 삼보증권을 흡수합병해 대형화를 이루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때 정부는 파산한 삼보증권을 대우에서 인수토록 권유했다. 이에따라 대우는 삼보증권 인수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고 1983년 12월 19일, 당시까지 자본금(80억원) 및 외형에 있어서 동양증권과 선두를 다투던 삼보증권을 흡수 합병하여 모든 면에서 명실공히 업계 1위를 달리는 대형 증권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동양증권은 1983년 9월, 재무부로부터 합병인가를 받은 후 10월 24일 상호를 대우증권으로 변경했다. 지속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상호변경에 대한 이의도 있었지만 회사 면모를 새롭게 하여 미래지향적이며 해외지향적인 대우가족으로서 새출발 하자는 각오로 상호를 변경, 대우증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제 대우증권은 경쟁사에 비해 모든 부문에서 거의 2배에 가까운 규모를 갖추게 되어 투자자들에게 보다 큰 공신력을 주게 되었으며 특히 증권시장 국제화에 적극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1983년 7월 경기 침체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주식 발행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자본시장 기능확충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종래 장세변동에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었던 증권회사의 경영체제를 전환시키는 획기적인 방안으로서 이에따라 증권업은 새로운 방향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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