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역사는 곧 부실기업의 인수와 정상화로 점철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 군소섬유업체들의 인수에서부터(한양상사, 고한실업, 세창직물, 동남섬유, 오성염직, 남양산업, 동화실업 등) 1976년 기계장치부문 진출의 계기가 된 만년부실기업 한국기계의 인수정상화, 1978년의 새한자동차 인수정상화, 그리고 옥포조선소 인수정상화, 1982년 대한전선 가전부문 인수정상화, 경남기업 인수정상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한국경제의 구조적문제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부실기업들은 정리 이후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경제를 멍들게 했던 부실기업에 대한 문제의식 만큼이나 부실기업을 해결해온 정부와 인수기업의 노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정부의 노력에 대해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는 비단 부실기업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정부의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 특징들은 첫째, 정부는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수준에서건 기업에 대해 개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정부는 개입에 있어서 이념적 이유에서 보다는 합리적 이유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강했다. 셋째, 지금까지의 예로 볼 때 정부는 간접적 조작을 넘어 직접적 명령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다. 넷째, 정부의 개입이 개별회사 별로 결정을 내릴 정도로 극히 재량적(裁量的)이었다. 다섯째, 이러한 류의 재량적 결정은 행정의 최고위층까지 관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개입의지는 특히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왔다. 사실 부실기업 문제는 말미에 가서는 정부의 적극 개입에 의해 제3자 인수형태로 처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즉 정부는 직접적 명령, 혹은 재량적 결정에 의해 인수자로 선정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이 경우 기존의 경영실적, 재무상황, 경영자의 자질과 능력 등이 그 선정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정부가 이처럼 부실기업 처리와 정상화에 부실기업과는 무관한 제3의 기업을 끌여들인 것은 기업의 해체에 따른 고용불안, 물품 대금문제 등으로 나타나는 선의의 제3자 피해, 그리고 때로는 신용공황의 가능성까지도 고려할때 불가피한 상황으로 파악된다.
부실기업 인수는 이처럼 타의에 의한 혹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기존 경영체제와의 맞물림 속에서 일부는 기존 기업의 부실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또 일부는 뛰어난 경영진의 노력에 힘입어 정상화의 길을 걷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실기업 처리에 있어 그 파급효과를 최소화 하고 또한 아무리 부실하더라도 기업자체 만큼은 살리고자 했던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부실기업은 결국 인수기업이 마지막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부로서는 인수기업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경영능력이 탁월하다고 판단되는 기존의 대기업에게 부실기업 정상화의 책무를 부여해 왔다. 결국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최대 장애요인이자 문제아였던 부실기업은 그와는 다른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총아인 유능한 기업의 경영활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했다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대우는 이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모두를 정상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현재도 세계경영의 최전선에서 많은 외국기업들이 대우의 인수를 거쳐 정상화되었거나 되어가고 있다. 이는 대우가 중추적 계열기업을 창업이 아닌 인수를 통해 편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또 인수된 기업들은 대부분이 최악의 부실상태에서 대우로 넘어왔다. 대우가 걸어왔던 부실기업 인수와 정상화의 경영사는 그 나름대로 몇가지 의의를 전해준다.
첫 번째 의의는 거시적 의미에서 부실화된 국가 기간산업을 대우의 의지로 소생시켰다는 점이다. 기간산업은 문자 그대로 국가 경제의 기본을 이루는 분야이다. 따라서 이 분야의 부실화는 자칫 잘못하면 경제전반의 침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대우가 기간산업 부문을 정상화 시킨 점은 기업차원을 넘어 국가경제에의 기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한국기계 인수에 의한 대우중공업 출범시에도 대우는 이점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 흔히들 소극적이며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기계공업이나 중화학공업은 투자 회수기간이 길고 소요자금 규모가 과대하며 시장규모가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도상국가의 기업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산업이라고들 이야기 하고 있지만 우리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일찍이 일본이나 독일의 중화학공업화 과정을 보더라도 이러한 패배적이며 퇴영적인 사고와 자세를 극복하고 자기 나라의 인력이나 기술, 경제 여건에 맞는 중화학공업 개발전략을 마련하고, 과감하게 실천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으로의 전환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 임시주주총회에서 김우중사장의 발언-
* 1976년 10월 30일 오후 2시. 한국기계는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대우기계(주)와 의 흡수합병을 보고하는 한편 상호를 대우중공업주식회사로 바꾸었다.
경영주의 이러한 소명의식과 의지로 결국 40년간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던 만년 부실기업 한국기계를 인수한 첫해에 흑자로 변환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국가 기간산업체인 옥포조선소를 조선공사로부터 인수 받아 완벽한 시설의 국제조선소로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의의는 대우가 인수한 기업들은 한결같이 재무구조가 악화된 부실기업이었다는 점이다. 대우는 이들을 인수한 후 대체로 짧은 시일안에 정상화에 성공했다. 개발연대에 우리기업이 가졌던 경영상의 지식이나 기술력, 정보력 시장개척력 등을 고려할 때 당시에는 부실기업 발생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부실화된 기업의 유휴자원이 갖는 국민경제적 가치를 고려할 때 어떠한 방법으로든 부실기업의 단시일내 정상화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우가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실기업들을 인수하여 짧은 시일안에 정상화시킴으로써, 개발년대의 산업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대우가 인수한 기업들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결코 수익성이 높다던지, 아니면 적어도 이 부분을 인수의 호재로 삼을만한 종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의의는 정상화의 방법이 축소지향적, 다시말해서 감량경영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확대지향적인 적극적 방식을 채택하여 성공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모든 기업에 있어서 부실기업의 처리유형은 그 기업이 갖는 적정 매출규모를 확대하려는 적극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원가절감이나 투자자본 회수, 인력감축, 유휴설비 매각 등을 통한 감량경영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방식은 나름대로 기업의 견실화를 도모하는 경영방식은 될 수 있으나 관련 하청기업의 외형축소, 유휴인력 발생 등 경제적 파급효과를 고려한다면 반드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우가 이와는 다른 적극적 정상화 전략을 채택하고 이를 성공리에 정착시켰다는 사실은 보다 효율적인 경영 패턴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우가 창조해낸 부실기업 정상화 방법에는 뚜렷한 특징들이 있는데, 우선 부실기업 인수 시 종업원의 사기진작을 위한 혁신적 복리후생 정책을 시행했다는 점이다. 대개의 부실기업에 있어 종업원들의 사기저하에 의한 생산성하락 문제가 그 본질을 이루었음을 감안한다면 대우의 복리후생 정책은 부실화 요인의 정곡을 찌르는 해결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시설과 투자를 확대하고 이에 필요한 자본금의 증자를 단행했으며 종업원도 확충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켰다. 그런 다음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종업원의 해외연수와 교육 등을 통해 경영의 질적 향상을 추구하고 기존의 내수 및 수출조직을 활용하여 매출 신장을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네 번째 의의는 경영능력, 곧 혁신적 기업가 활동을 통해 부실기업의 정상화를 달성했다는 점이다. 부실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 바로 경영능력의 한계이다. 극히 일부분의 예외를 제외할 때 우리나라 부실기업들은 소유자의 경영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기업의 운명은 소유자의 역량에 의해서 좌우되었고, 부실기업 정리에 있어서 소유자의 경영자질과 정부, 금융기관, 그리고 사회일반이 보이는 소유자에 대한 신임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기업경영에 있어 실패의 체험은 우리나라 기업가에게 거의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업가는 경영실패를 자신의 역량으로 극복해낸 반면 부실기업 소유자들이 경영위기 극복에 실패했던 것이다. 기업가의 역량과 부실기업의 관계는 그 처리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우가 정부로부터 부실기업의 인수와 정상화를 인수받았을 때 정부의 권유 이유는 바로 대우의 경영능력에 대한 고신뢰 때문이었다. 흔히 기업가의 역할이나 능력은 시장에 내재하는 결함을 메꾸면서 생산요소를 획득하여 결합하는 데 있다고 말할 때 대우는 부실기업을 정상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경제기회의 발견과 평가, 필요재원의 조달, 최종책임과 위험, 불확실성의 부담, 새로운 정보의 발견과 활용 등 기업활동에 필요한 요소를 거래하는 시장이 불완전 할 때 그 결함을 메꿀 수 있는 노력이 바로 기업가의 자질이다. 하릴없는 장삼이사들이 이죽거리기를, 대우가 맨주먹으로 일어나 거대한 기업집단이 됐다거나, 정부의 특혜를 받아 부실기업을 정상화시켰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은 투자의 기회를 찾아내고 필요한 기술과 노동을 결합시키며, 은행을 설득하여 투자를 유도하는 등 앞서가는 경영능력에 의해 수많은 부실기업을 정상화 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오늘의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합하면 대우의 부실기업 정상화는 비단 대우 성장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작은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다. 대우가 수행한 부실기업 정상화의 피나는 노력은 그 자체로서도 경영학적 의의를 갖기에 충분하다. 또 한국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부실기업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경영사적 의미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업 이후 일관되게 수출을 통해 한국경제의 진로를 앞서 개척해왔던 대우는 오히려 그 성장의 궤적이 남긴 최대의 문제거리였던 부실기업 처리에 있어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