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에 진출한 대부분의 외국기업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철수하던 1992년에 대우는 페루시장의 가능성을 탐색하고는 비장한 각오로 진출했다.
그리하여 1996년 12월 현재, 현지에서 활동중인 대우사업장은 (주)대우 리마지사와 대우자동차판매법인을 비롯해 자동차판매를 지원하는 금융회사, 대우전자판매법인, 리마 시내에서 운행중인 콘소르시오 비아 시내버스회사 등이다.
1995년말부터 자원확보 차원에서 페트로페루 국영석유회사 민영화프로젝트에 국제 컨소시엄의 일원으로 참여한 대우는 1996년 6월에 페루 북부 밀림지역의 8/8X광구 육상유전 사업권자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한국이 국외의 원유생산광구에 최초로 투자한 사업이었다.
이밖에도 대우는 타이어 플랜트 사업참여를 검토중이며, 지게차와 굴삭기 등 중장비 사업도 기반을 다져 놓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화려한 성과를 낸 분야는 자동차였다. 1996년 12월말 기준으로 대우는 페루 국내 신차판매 시장점유율 25.3 %로 2년연속 1위를 달리며 도요타와 닛산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1천5백cc급이하 시장의 월드카 전략상품으로 내놓은 에스페로와 씨에로, 티코가 현지 시장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No.1 브랜드」로 날개를 단 것이다.
후지모리 대통령과 빅토르 호이 와이 국회의장 등 페루의 지도층들은 대우의 기업활동에 대해 「페루 경제를 이끄는 기관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GM측과 결별을 검토할 즈음 대우는 본격적으로 신규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때 시장잠재력이 큰 중남미 지역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은 현지인 딜러를 통해 판매하는 방식이었는데, 대우는 수출물량의 확대 및 과감한 수출 드라이버 정책을 위해 위험부담이 따를지라도 직접 판매방식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직접판매 시도는 미국시장에 진출할 때를 대비해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고, 다른 시장의 진출시 현지법인을 통한 수출방법에 대해 시험해보는 전략적인 점도 고려되었다.
대상국가로 페루외에 여러나라가 검토됐으나 대금회수 문제에 위험부담이 큰데다, 현재는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시장잠재력이 큰 페루에 우선 대우단독 판매법인을 설립키로 결정했다.
1992년 10월 법인이 설립될 당시 페루는 후지모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사회안정과 경제부활에 중점을 두고 각종 개혁시도 및 경제성장을 위한 방안으로 외국인 투자유치를 적극 유도하고 있었다. 그즈음 페루의 치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어서, 좌익 테러단체가 관공서, 교회, 은행, 학교, 기업체에 폭탄테러를 자행, 사회불안을 야기시켜 위험한 시국이었다.
법인설립을 위해 대우는 해외경험이 많은 대표 1인과 남미지사 관리책임자 그리고 본사에서 선발된 서비스 책임자 등 3인으로 법인창설요원을 구성했다. 페루 입국전에 파나마 법인에 도착한 요원들은 페루의 현 시국이 매우 위험하니 입국을 지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페루가 그렇게 테러가 심각한지 몰랐었고 잘못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염려 때문에 페루 입국문제는 심각히 재검토해야 했다. 그러나 요원들이 내린 결정은 예정대로 입국을 강행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대우인들이 세계 오지에서 신시장을 개척할 때마다 보여준 도전의식과 개척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법인창설 요원들의 페루에서의 생활은 매일 어디서 폭탄이 터지고 누가 테러를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숙소를 한달에 두번씩 옮겨 다니는 것으로 시작됐다. 실제로 대우인들은 위험한 고비를 여러차례 넘겼다. 자동차 판매를 위해 다니다가 주변에 총알이 스쳐지나가는걸 경험하기도 했고 신호대기 중인 차속에서 강도를 당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옆에 있는 은행건물이 폭파되는 바람에 사무실 창문이 박살나고, 또한 공동숙소인 아파트의 알루미늄 창틀이 날아가기도 했다.
본사에서도 개인의 신변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귀국여부는 현지에서 판단하라는 본부장의 지침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를 견디면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동안의 고생 때문에 귀국의 종용을 뿌리쳤다.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던 것은 페루에서 대우의 이미지가 너무 생소해 아무도 선뜻 딜러가 되려고 하지않는 것이었다. 현지 도요다 사장은 대우의 진출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는 자신있게 떠벌릴 정도였다. 그러자 길이 열렸다. 모두들 ‘기필코 대우가 1등이 되어 이들이 후회하도록 만들겠다’는 오기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유력인사 및 벤츠․BMW 딜러를 설득했고 이 작전은 주효했다. 이들의 딜러 선정과 동시에 직원채용, 사무실계약, 통관사 선정, 각종 규제사항과 법규절차, 광고 등 일련의 업무가 불과 2-3개월만에 이루어졌다. 그후 차량과 서비스부품이 4개월만에 도착했는데 모든 업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히 처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판매를 본격 시작, 진출 3년만인 1995년에는 도요다, 닛산, 포드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23.9 %로 판매고 1위의 신화를 기록했고, 현지 국립대학에서는 이의 성공사례 연구붐마저 일었다.
페루 자동차시장에서 대우의 No.1 브랜드 위상을 알리는 행사가 1996년 7월28일 페루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벌어졌다. 다름아닌 「캬라반 대우 96」 행사였다. 에스페로, 씨에로, 티코 등 4대의 대우차가 8천㎞에 달하는 페루 전역을 주행한 후 독립기념일에 리마로 골인, 시 전역에서 4시간동안 퍼레이드를 펼쳤는데 총 1백50대의 대우차가 페루 국기와 대우깃발을 펄럭이며 리마시 전역을 누볐다.
그리하여 대우는 튼튼한 뿌리를 페루에 내렸다. 한예로 페루 경찰의 순찰차는 에스페로다. 1993년 페루가 발주한 경찰순찰차 구매입찰에 대우가 참가, 페루 수출 단일거래로서 최대규모인 4백만달러 규모의 순찰차량 전량을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페루 택시의 베스트셀러는 티코다. 티코는 페루에서 「환타스 티코(환상적인 티코)」로 불린다. 이카라는 도시에 가면 택시의 80 %가 티코다. 이 도시에 사는 한 맹렬여성은 티코 1대를 월부로 구입해 택시업에 뛰어들어, 1년만에 티코 택시를 42대로 늘려서 「기적의 주인공」이 됐다.
짧은 기간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비결은 「남들이 게릴라 때문에 철수할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든 리스크 테이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