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건설업체로서는 후발주자였던 대우는, 중동에 진출하여 국내기업끼리 경쟁을 벌이는 것을 지양하고 미지의 아프리카에 진출할 것을 결정했다.
그 전초기지는 수단이었다. 당시 수단은 군정의 출발과 함께 외국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아랍제국,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강화하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이 상당수의 기술자를 파견해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나라와 경제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바로 이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는 것이 대우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을. 대우는 늘 위기와 기회를 양팔에 잡고 자라온 기업이라는 걸.
대우의 경영진이 젯다에 모여 수단진출을 논의하고 수립하는 중에 입국이 허용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 날은 1976년 4월 19일이었다. 대우 못지않게 수단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한국정부의 의지도 컸다. 외무부에서 실무진이 대우의 경영실무진과 함께 수단에 입국한 것도 다 외교를 맺으려는 의지에서였다.
창업주 김우중 회장을 비롯한 일행은 홍해상공을 날아 수단에 입국하였지만 고위층 접촉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22일까지 3일을 기다렸다.
모두 지칠 때쯤되어 기회가 찾아왔다
4월22일,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 영빈관에서 수단측 장관 3명과의 가든 파티가 성사되었던 것이다. 대우의 창업주는 이들 장관에게 대우의 사업계획을 설명하면서 설득에 나섰다.
그러자 수단측에서는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고, 북한 기술자도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두 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국과 근본적으로 수교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관계를 터넣고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계속 설득했지만 그들은 “부크라 부크라(다음에)”란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대우의 경영진은 사업적으로는 설사 불리를 당하더라도 양국이 외교관계를 맺기를 바랬다. 회의와 고심으로 한밤을 꼬박 밝힌 일행은 이튿날 철수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각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대통령궁으로 연락을 하기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다. 누메이리 대통령이 대우의 창업주를 접견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희망과 환희로 바뀌었다.
대통령궁에서 만난 누메이리 대통령은 귀빈을 놓칠뻔 했다면서 사업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회담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김우중 회장은 3명의 장관에게 했던 사업계획을 상세히 대통령에게 설명하였다.
하루가 지난 4월 24일, 누메이리 대통령은 한국과 수단과의 영사관계 수립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막바로 2차 접촉이 이뤄졌다. 접촉후 처음부터 대두된 것이 수단의 영빈관 건설이었다. 니메이리 대통령은 OAU(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회의를 앞두고 직접 영빈관 건설 문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대우측에서는 수단측의 안을 검토하고, 대우의 새로운 안을 내어 토의하자는 제의를 했다. 이를 수단측에서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만큼 대우의 사업을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대우의 실무추진팀은 그 때부터 설계도를 들고 한달에 세번이나 수단을 왕래해가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당시 수단을 다녀오는 데만 1주일이 걸렸던 점을 감안하면 영빈관 수주를 위한 초창기의 어려움은 엄청나게 컸다. 그리하여 대우가 낸 새로운 안이 누메이리 대통령을 만족시켰고 대우는 북아프리카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수단의 폭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5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아래서 공사수행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했다. 공사는 6월부터 시작되었다. 기온이 높아 한낮에는 쇠가 달아 자칫하면 화상을 입기가 일쑤였다.
작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가죽으로 장갑을 만들고 철골 위에 합판을 깔고앉아 작업을 강행하는 방법을 썼다. 그걸 본 현지인들은 혀를 내둘렀음은 물론이다.
원래 철골공사는 열악한 환경을 감안하여 3개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우는 철골공사를 앞당겨 75일만에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정확한 공정에 의하되 쉬지않고 일한 보람 끝의 단축이었다. 대우 특유의 부지런함이 수단인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였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궁이 영빈관 공사현장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누메이리 대통령은 여러번 발코니에 나와 공사현장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건 하룻밤을 자고나면 한층씩 올라가는 영빈관에 대한 기대보다도, 대우인들의 의지와 도전정신에 놀라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뜻에서 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 내부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또 다시 난관이 앞을 가로막았다. 자재가 원할히 공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빈관공사에 소요된 자재는 90 % 이상이 한국산이었다. 국내에서 구입했을 당시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던 제품이 두달 동안의 운송과정을 거친 후에 심하게 변질되거나 변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근국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었지만, 대우는 국산자재의 사용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대우는 국산자재를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하역시간과 운송시간을 단축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결론을 얻은 대우는 전시중의 군수물자 운반작전을 방불케 하는 특수운송작전에 돌입하여 마침내 국산자재가 변형과 변질없이 도착할 수 있었고, 공사는 진척을 보게되었다.
2년만인 1980년 5월 27일, 수단영빈관은 호텔로 운영될 계획으로 개장되었다. 수단 사람들이나 이 행사에 참가한 이디오피아의 엥기스루 대통령 등 축하객들은 대우의 노력을 목소리 높여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리하여, 수단민주공화국에 대우의 기술로 지어진 영빈관은 지상 12층, 지하 1층에 2백여개의 객실을 갖춘, 당시 수단에서는 최대의 건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수단 영빈관은 이 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1992년에 수단정부와 합작방식으로 대우가 인수하여 팔레스호텔(PIC-Palace International Corporation)로 명명되었다. 팔레스호텔은 1996년 5월부터 영업에 들어갔는데 기대이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객실 60여실과 양식당, 헬스클럽,수영장 등 부대시설을 완비하고 있으며 나일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수단의 수도 카툼의 명소로 인기가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