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대우는 1977년 수단에 첫발을 디딘 이래 1978년 리비아에 이어 1983년 나이지리아로 진출했으며, 이듬해 84년에는 라이베리아로 전격 진출했다.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라이베리아는 1822년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해방된 노예 16,400명을 말라게타 및 곡물해안에 이주시켰으며, 구라파 각지의 흑인노예 약 6,000여명이 자연 조건이 좋은 몬로비아(당시 미국 몬로 대통령 이름을 따서 명명)와 그린빌 지역에 정착하여 주로 곡물 재배에 종사하였다.
1947년 7월 26일, 미국의 후원하에 독립하여 아프리카에서 이디오피아 다음으로 독립공화국이 된 이 나라는 미국의 그늘에서 오랜동안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대우가 진출을 결정한 당시는 1980년 4월 12일 원주민 출신 사무엘 도우 특무상사 주도의 군사혁명이 발생해 사병집단에 의한 혁명정부가 수립된 지 4년이 지나있던 때였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도우상사가 대통령이 된 후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미국의 군사기지 설치로 군사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라이베리아는 국토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고, 대우 또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라이베리아의 첫 프로젝트는 도로공사였는데, 프리타운에서 몬로비아까지의 하이웨이가 바로 수주대상이었다. 서부아프리카에 대우의 교두보를 만들려면 라이베리아로의 진출은 필수였다. 그러나 입찰에 참가한 대우는 독일에 이어 2위로 밀려나야했다.
하지만 대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회사는 마르크로 견적을 제출했고, 대우는 미국 달러로 견적을 제출했었다. 거기에 길은 있다고 판단하여 분석한 결과 환차발생 위험성을 발견하고 이에 항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라이베이아 정부는 미국 달러로 차관을 얻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도우대통령은 이미 독일회사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대우는 라이베리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도우대통령을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환차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고 그 부당성에 대해 자칫하면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대하던 도우대통령도 조금씩 대우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대우는 라이베리아의 도로공사를 수주할수 있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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