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진출이 활발해지자 창업주 김우중 회장은 당시 실무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프리카의 두 나라에 반드시 진출하고 싶다. 아니 진출하고야 말겠다. 그 나라는 알제리와 앙골라다. 시장개척에 있어서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고 자원이 풍부한 것이다. 그 중에서 두 가지만 충족되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그 나라가 아프리카에서는 바로 앙골라와 알제리이다….」
알제리는 역사가 길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의 타실리 고원에는 당시의 생활을 그린 동굴화가 있다. B.C 12세기에는 페니키아인의 무역기지로 번창했었다. 7세기에는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15~16세기에는 스페인과 투르크의 침입을 받았다.또 1830년에는 프랑스의 통치아래 있었다. 20세기 초부터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여 7년간의 독립투쟁 끝에 1962년 독립했다.
알제리는 천연가스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아프리카에서 수단 다음으로 큰 나라다. 게다가 대우가 진출하려던 당시엔 아프리카에서 가장 공업화된 나라였다. 인구는 약 2,300만명인데, 이중 아랍계가 70 %이고 원주민인 베르베르계가 약 30 %였다.
알제리는 대우가 1970년대부터 진출하고자 했던 나라였다. 그만큼 알제리는 기업인의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는 한국과 이스라엘, 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4개국인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한국인의 입국을 거절하는 이유는 알제리가 불란서 식민지시절 독립운동을 할 때 북한으로부터 받은 도움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우에게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1986년 어느날 대우의 런던 사무실로 불란서의 한 석유상이 찾아왔다. 그는 대우와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대우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으니 뭔가를 도와주려고 다방면에서 고심해왔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는 대우와의 좋은 거래관계를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불쑥 알제리 대통령과 대우인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도 대우의 해외지사에서는 그런류의 제의에 여러번 따랐다가 실망을 해왔던 터라 정보를 접하고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파리시장인 ‘시’락이 보증이었다. 당시 ‘시락’은 총리설이 나돌고 있던 중이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시락은 대우가 알제리로 진출한 후 불란서 총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우의 창업주 김우중회장은 시락의 집무실에서 시락과 첫대면을 하였다. 이 대면에서 시락은 알제리 대통령을 만나게 해줄 뿐 아니라 대우를 위해 알제리와 다리를 놔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었고 그 약속은 그 날로 지켜졌다.
기회를 얻은 창업주와 실무진은 그날로 알제리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알제리 최초의 입국이었다. 시락의 중재로 창업주는 알제리 대통령을 만나 한국 정부의 정책 등을 내세워 알제리와 교류를 갖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어렵게 알제리 진출발판을 마련했으므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은 물론이었다.
그 결과 힐튼호텔과 알제리 상공성 등의 건설공사와 함께 자동차 비지니스를 비롯한 무역업무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대우가 알제리 진출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분야가 그랬지만 후발주자라는 데 있었다. 특히 건설분야는 프랑스가 오래전부터 진출해 있었고 환율 등의 문제가 있어 결코 매력적인 시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우는 바로 앞의 떡만을 보고 달려가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훗날을 위한 포석으로 대우의 이미지를 아니,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심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의 결과는 곧 나타났다.
인민공화제 사회주의 국가로 공산권과 가까웠던 알제리는 한국과 1990년 1월 15일 대사관 설치에 합의하여 4월에 정식 조인했다. 대우의 진출은 곧 민간외교의 진출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또 한 번의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굳건히 닫혔던 사회주의국가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와 자부심을 대우인들은 간직할 수 있었다. 수단, 리비아에 이어서 알제리도 정부보다 대우가 먼저 진출했고, 양국간의 수교에 한몫을 했던 것이다.
알제리에서 대우의 첫프로젝트는 힐튼호텔이었다. 1989년 1월 착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하여 4년만인 1993년 8월 15일 개관한 힐튼호텔은 지하 1층, 지상 13층으로 400여개의 객실과 레스토랑, 헬스클럽, 수영장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춘 국제수준의 호텔로서 손색이 없었다.
알제리 힐튼호텔은 지중해연안의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주위환경과 잘 어울리도록 설계된 준수한 외관과 내부의 적절한 마감처리, 현대식 설비가 조화를 이뤄 알제리 정부 및 국민들은 물론, 호텔 운영회사인 힐튼인터내서녈에서도 대단히 만족해한 대우의 작품이었다. 또 알제리 시내의 몇몇 호텔과는 비교도 안됨은 물론, 유럽지역의 국제적 호텔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프리카 최우수호텔로 평가받은 대우의 혼이 깃든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친 자화자찬이 아닐 것이다. 이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대우는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비근한 한 예로 공사금액은 변동이 불가하다는 독소조항이 있는 턴키(Turn-key)프로젝트로서 설계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발주처 현지 파트너의 무리한 요구, 예기치않은 공정지연 등으로 숱한 고전을 해야했다.
하지만 목표예산을 별도로 정하고 설계조정, 적정자재 선정 및 인력 활용 등 공사 전반에 걸친 공사비 절감 방안을 수립하여 적극 추진하였고, 준공 정산시에는 잔여손질에 대한 클레임을 제기하여 보상을 받음으로써 손실을 최소화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현지국의 자국 인력양성을 위한 제3국 인력사용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제3국 인력 사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 공사 성격상 외산 고급자재를 많이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국산자재를 써 대우와 한국의 이미지를 심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불리를 감내하면서 대우가 알제리의 1호 작품인 힐튼호텔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대우가 알제리에서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작품을 남겼는 지 오래도록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