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대우의 성장에 밑그림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던 곳이었다. 1969년 원단수출에서 봉제로의 전환도 미국시장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큰 시장이었던 미국을 철저히 분석하여 트리코트 원단을 개발해 미국인의 기호에 맞는 의류를 생산해 수출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또 미국의 섬유쿼터가 발효될 것이라는 걸 예측하고 생산시설을 확충했으며, 그에 충분히 대비하였기에 1970년부터 막대한 양의 수출을 할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스톡세일즈의 시험무대도 뉴욕이었다. 그 미국에 세계경영의 본궤도에 올라있는 대우는, 다시한번 공략하기 위해 전력하고 있다.
1996년 12월 기준으로 미주에는 32개소의 법인이 운영되고 있다. 연구소가 3개소에 13명의 주재원과 25명의 연구원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무역부문의 지사만해도 15개, 건설지사 4개소, 전자,통신 6개소, 중공업 2개소, 증권2개소다.
무엇보다 괄목할만한 성장은 자동차부문이다. 1992년 거대기업 GM과 헤어진지 겨우 5년, 순전히 우리의 능력으로 98년이면 대우자동차의 생산량은 200만대, 2000년이면 250만대가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손가락질 하며 가르쳤던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것도 지금껏 제품의 문제로 수출을 미룬 것이 아니라 GM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국시장에 상륙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세계자동차 역사에 유례없는 3개 모델 동시개발과 그 모델의 미국진출은 대우에게 있어 가슴 뭉클한 일이다. 시어즈 로벅과 언더웨어, 반호센 등과 같은 섬유 바이어들로부터 중기와 자동차로 이어지는 대우의 미국진출을 대우인들은, 전쟁에 이긴 직후 자만에 빠지지 않고 다시 숙연히 갑옷을 여미는 병사의 마음가짐으로 기다리고 있다. 어찌보면 대우의 미국진출은 골리앗 앞의 다윗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