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유럽의 금융도시국가 룩셈부르크에서 자동차로 유럽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 프랑스 로렌의 소도시 롱위시다. 거리 곳곳의 큰 화분은 과거 석탄운반에 사용되던 차량의 모습을 살짝 바꾼 것들이다. 이 도시가 한때 철강과 석탄산업지대였다는 것을 처음 온 사람들은 모른다.
롱위시에는 대우전자의 전자렌지공장과 TV의 핵심부품인 브라운관(CRT)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기업으로는 최초로 1988년 10월 프랑스에 설립한 현지공장으로 현재 유럽시장에서 최고의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는 롱위의 전자렌지공장(Daewoo Electronics France)은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파멕시의 컬러브라운관 공장(DEMSA)과 조화를 이뤄 이 일대는 그야말로 ‘대우타운’을 이루고 있다.
이중 파멕 컬러TV공장 DEMSA(DAEWOO Electronics Manufacturing S.A)와 대우전자와 오리온전기가 1억2천7백만달러를 절반씩 투자한 롱위 컬러브라운관 공장인 DOSA(DAEWOO Orion S.A)는 유럽연합(EU)의 블록화에 대응해 컬러TV의 핵심부품에서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현지에서 자체해결, 유럽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대우의 ‘야심찬 의지’가 담겨있는 곳이다.
1988년 6월 30일 대우와 프랑스 JCB사는 대우빌딩 5층 국제회의실에서 전자렌지 생산공장 설립을 위한 합작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JCB는 1987년 총매출액이 4억달러에 달하는 프랑스내 1~2위를 다투는 가전제품 전문판매회사로서 지난 1985년부터 대우의 전자렌지를 수입, 판매해온 회사였다.
공장은 모두 5천4백만 프랑을 투자하여 1989년 2월, 프랑스 동북부 공업지역인 로렌지방의 롱위시에 대지 1만평, 건평 2천평 규모의 공장이 건립되었다.
정식명칭은 D.E.F(DAEWOO ELECTRONICS FRANCE S.A). 이 공장은 연간 20만대의 전자렌지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으로, 합작초기의 자본금 1천만 프랑은 대우가 51%, JCB가 49%를 출자했으나 증자과정을 거치면서 대우의 지분율이 높아져 지금은 총투자액 9천1백만프랑 중 총 66%를 대우가 보유하고 있다. 대우전자가 경영권과 제품설계에서 생산일체를 맡고 프랑스내 판매는 JCB가, 그외 지역 수출은 대우가 맡고 있다.
대우는 이 공장에서 내용량 32리터 이상의 고급형 모델 및 오븐그릴 기능을 갖춘 제품 등 부가가치가 높은 고품질 다기능 전자렌지를 주로 생산하여, 제품경쟁력을 높였다.
초기에는 생산체제의 효율성 문제와 모델의 단순화가 순이익을 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합리적인 생산체제로의 변경과 모델 전략의 다양화로 1991년부터는 흑자경영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나아가 현지의 법인 모델 전략의 다양화로 1991년부터는 흑자경영으로 온전히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지의 법인 담당자들이 공장경영을 하는데 있어서 현지 채용직원들에게 강조하는 점은 늘 “이 회사는 프랑스회사이지 한국회사가 아니다”이다. 이는 경영의 기본을 프랑스의 문화, 관습, 사고방식에 맞추고 한국식 경영방식의 장점을 점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현지인에게 경영의 주체를 점진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세계화는 바로 이런 철저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생산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국내에서 전부품을 가져다 조립 생산하였으나, 점차 현지의 부품조달 비중과 공급율을 높여 현재는 프랑스 내의 관련사업 부분의 발전에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대우는 이어 1996년 6월 13일 대우전자와 오리온전기가 50대 50 비율로 총 1억2천7백만달러(자본금 2천만달러)를 투자한 유럽 최대규모인 컬러브라운관공장(DOSA)을 건설, 준공식을 가졌다.
이 공장은 프랑스 로렌지방 롱위시 근교 유럽연합(EC) 경제부흥지역인 마르뗑스트리트 3만1천평 부지에 건평 7천3백평 규모로 건설되었으며 14인치 및 20인치, 21인치 등의 중소형 컬러브라운관을 연간 2백만개씩 생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향후 25인치, 28인치 등 대형제품은 물론 와이드 TV용 브라운관도 생산해 대형화, 고급화한다는 방침이다.
이로써 대우는 프랑스 TV공장 및 폴란드 TV공장과 함께 핵심부품에서 완제품까지 TV 현지 일괄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공장에는 대우정보시스템의 생산관리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60대의 워크스테이션과 호스트 및 단말기를 네트워크로 연결한 공장시스템, 물류자동인식시스템, 설비감시체계 등의 첨단기술, 다양한 시스템통합(SI)기술, 기계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센서로 부품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최첨단 자기진단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대우가 유럽시장의 본격적 진출을 계획하게 된 이면에는 갈수록 심화되는 유럽연합(EC)의 수입규제가 수출전략의 큰 장벽으로 떠오른 때문이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던 대우의 눈에 든 곳은 과거 프랑스의 롱위지역이었다. 이 도시는 한국인들에게 알퐁스 도데의 소설인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 익숙한 지명이나 실제로는 과거 프랑스의 철강산업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철강산업의 쇠퇴로 인해 공장문을 하나 둘씩 닫기 시작하여 당시 프랑스 정부로서는 실업자 대책과 산업전환의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역이었다.
대우가 눈여겨 본 점은 이 지역의 우수한 노동력이 아직 풍부하고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인접한 지역이라 교통수단이 편리하다는 점이었다. 차후 유럽연합(EC) 시장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필수 요소는 편리한 교통과 양질의 노동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유머기질이 돋보이며 모국어인 불어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나라 프랑스. 프랑스인들은 원래 활달한 민족으로 한국인과 비슷한 감성적 민족이다.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의 모습도 그러한 국민성에서 발현되었고 같은 유럽의 강국이지만 독일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은 지나치게 낙천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강한 유머감각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우가 발을 내딛은 알사스 로렌의 첫 인상은 전체적인 프랑스의 인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 동복부 지역의 황량함과 유난히 매서운 바람은 첫 부임한 주재원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어려움을 달게 받아들이는 희생정신이 바로 대우의 정신이었기에 주재원들은 곧 프랑스인들과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이면서 가장 고급시장으로 다양한 소비자와 수많은 현지업체를 포함해 전세계 제조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장(場)으로서 많은 어려움도 있지만 현지 생산, 판매,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해 현지 마케팅전략을 수립하여 프랑스 파멕의 칼라 TV공장과 롱위의 브라운관공장을 잇달아 설립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대우의 진출로 롱위 뿐아니라 인구 2만의 작은 도시인 파멕도 점차 생동감 넘치는 마을로 바뀌어가고 있다.
“대우가 파멕시에 진출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시로 재탄생했다.”
미셀 리브고트 파멕시장의 말이다.
철강․석탄산업이 쇠퇴하면서 지역경기도 침체됐는데 대우가 전혀 새로운 산업인 전자업종으로 투자, 새로운 시로 거듭나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 번성했던 철강산업의 쇠퇴로 인해 높은 실업율에 시달리는 이곳 주민들에게 외국기업들이 공장을 신설하고 현지인을 채용하는 것이 지역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알자스 로렌지방은 독일과 벨기에, 룩셈브르크의 국경 지방으로 유럽 대륙의 중심이며, 과거에는 변경지방 특유의 국토분쟁 지역이기도 했었다. 대우가 유럽 가운데서도 프랑스 파멕을 컬라TV공장 최적지로 선정하기까지는 투자조사단의 면밀한 사전검토가 있었다. 투자조사단은 1년 이상에 걸쳐 각국의 조세제도와 노동력, 지리적 조건 그리고 정부의 투자보조정책 등을 연구 비교 검토하였다.
한때 대우의 VCR공장이 있는 북아일랜드가 유력한 후보지로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적으로 풍부한 노동력과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인 잇점,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토지, 건물 무상공여 등 적극적인 투자유치 정책으로 로렌지방의 소도시 파멕을 최종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파멕 칼라TV공장(DEMSA)은 1992년 8월 법인설립 후 1993년 3월 완공까지 열악한 기상조건과 건물공사, 설비설치의 동시진행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대우인과 현지인들이 힘을 한데 모아, 1993년 4월 1차 조립라인 가동에 이어, 동년 10월 2일 준공시과 더불어 2개의 PCB라인을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DEMSA는 매년 증설을 거듭, 생산능력을 배가 시켜왔으며, 1996년에는 노동집약적인 PCB생산을 폴란드 소재 자매공장인 DEMPOL로 이전하고 성형공장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차 조립라인을 설치하여 년산 1백만대의 컬러TV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경쟁력있고, 튼튼하고 완벽한 품질의 대우 TV”라는 슬로건 아래 1993년 10만대의 칼라TV 생산을 시작으로 1996년에는 80만대 생산에 매출 1억5천만 달러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공장은 1996년 12월 기준으로 주재원 7명을 포함해 약 330명의 현지 종업원이 “우리는 대우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그 결과 주문량이 월 8만대 이상으로 생산능력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서유럽에서 공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는 ‘결근문제’를 첫번째로 꼽는다. 국민의 최저생활을 정부가 책임지는 사회보장제도로 인해 DEMSA 또한 초기에는 평균 7~8%의 결근률을 보였다. 그러나 개인 면담과 인사고과 반영 그리고 무결근팀 포상제도 등을 실시해 결근율을 5%이하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DEMSA는 유럽지역의 대형 컬라TV 공급기지 역할을 한다. 현지생산 TV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라운관공장(DOSA) 또한 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핵심부품공장 추가투자도 검토중에 있다. 이런 프로젝트들이 완료되면 유럽지역의 TV 일괄생산체제가 완성되고, 검토 단계에 있는 브라운관용 유리공장마저 이 지역에 들어설 경우 DEMSA는 유럽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TV공장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TV에 대한 소비자 기호는 점점 고급화, 대형화의 추세로 가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선호도 또한 시장별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소비자의 입맛이 점점 까다로와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대형화로 인한 운송비 부담증가 그리고 제품관세(14%)와 부품관세(7.2%)의 차이, 안정된 임금수준(연 2%인상) 등을 고려할 경우 유럽현지 공장설립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1995년 중 발효한 한국산 TV에 대한 반덤핑 관세가 18%나 되어 기존관세 14%를 감안하면 30%이상의 관세가 부가된다. 그렇게 되면 유럽시장 신규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해, 1992년도에 공장을 설립한 것은 정말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또한 1994년에 공장내에 설립된 TV연구소 유럽분소에서는 4명의 주재원과 2명의 현지 연구원이 유럽형 신제품 개발에 비지땀을 쏟고 있다. 제품의 연구개발에서부터 생산, 판매, 애프터서비스까지 일원화한다는 목표 아래 유럽인의 취향에 맞는 모델을 현지에서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시장 10%이상을 점유해 유럽 제일의 TV메이커가 되는 것이 목표인 DEMSA. 330여명의 종업원은 “경쟁력 있고 튼튼하고 완벽한 대우TV” 생산을 위해 오늘도 칼라TV에 혼을 불어넣고 있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프랑스 메츠 지역의 첨단 연구단지가 1985년 설립되어 신기술 개발과 상용제품 개발의 조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이 지역에서의 첨단 분야의 정보 습득이 용이한 점도 장점으로 들 수 있다.
프랑스와 대우의 긴밀한 투자관계는 한국과 프랑스의 우호 관계를 더욱 증진시켰다. 또한 프랑스내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우전자의 배순훈 회장은 1993년 10월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아었다.
앞으로도 프랑스에 대한 대우의 투자는 쉬지않고 계속될 것이다. EU를 중심으로 한 무역규제는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전망이고, 유럽 각국의 무역규제를 제치고 대우의 제품을 수출하는 방법은 현지 생산, 판매라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대우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우는 2000년까지 모두 7억달러를 투자,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축으로한 대규모 유럽가전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같은 야망의 중심축이 바로 프랑스며 로렌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대우의 전자공장들은 그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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