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Daewoo

경영의 기록

중국에 대한 글을 쓰려면 중국을 여행하면서 3일 안에 써야한다는 말이있다. 왜냐하면 3일이 지나고 나서 중국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면, 무엇이 진짜 중국의 모습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만큼 역사와 문화가 길고 다양한 나라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해온 나라 중화(中華). 그러나 아편전쟁, 청일전쟁, 신해혁명, 국공합작, 그리고 공산정부 수립에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사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화가 어느새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자는 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잠자는 용이 아니다. 등소평의 생전에 강력히 추진된 중국식 사회주의에 기초한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은 엄청난 변화의 길을 걸었다. 이제 중국의 움직임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국가경제의 고른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외자유치 및 SOC투자 확충에 힘쓰고 있으며, 세계 어느 곳보다 시장의 잠재 구매력이 높아 21세기 최대의 시장으로 꼽히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도 중국에 진출하여 생산기지 혹은 판매시장 차원에서 중국을 공략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대우가 볼 때 큰 의미를 갖는 나라다. 중국은, 국가간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교역과 경제협력의 물꼬를 틈으로써 시장확대와 함께 민간외교의 첨병역할을 해 왔던 대우의 해외시장 개척의 역사가 잘 반영된 곳인 까닭이다.
대우는 국교가 수립되기 전부터 홍콩 등을 경유해 중국 시장에 진출했으며, 1987년 5월 복건성 복주에 설립된 냉장고 합작공장은 국내 업체 중 최초의 중국 진출 사례에 해당한다. 1988년 8월 북경에 연락사무소 설치를 시작으로, 1990년 8월과 10월에 각각 대련, 상해에서 지사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0년 1월에는 한중합작으로 브라운관 생산업체인 「오리온 전기부품」을 국내에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이 한국에 투자한 최초의 경우에 해당한다.
또 1993년 1월에는 북경에 중국지역관리본부를 설치하였으며, 현재 중국지역을 4개구(▶북경구 : 북경, 천진, 서안, 청도, 제남, ▶동북구 : 대련, 심양, 하얼빈, 훈춘, ▶상해구 : 상해, 남경, 무한, 하문, ▶화남구 : 홍콩, 광주, 남녕, 성도, 곤명, 산두)로 분할해 지역특성에 맞게 관리중이다.
대우는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중국 경제의 발전과 호흡을 같이하며 성장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중에 있다. 아울러 현지화를 가속화시키는 차원에서 조선족 및 중국 현지인 고급인력에 대한 채용도 계속해서 늘려 나갈 계획이다.
대우는 1996년 말 기준으로, 중국에서 총 33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거나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북경 루프트한자 센타, 청도 석재가공공장, 계림 버스공장, 대련 가방 텐트공장, 천진 카오디오 공장, 산동성 시멘트 법인, 남경 판유리 공장, 목단강 제지 공장, 연길 호텔합작사업, 천진 유통센터, 하얼빈 위성수신기 공장, 동지나해 유전 탐사 프로젝트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자동차, 전자, 중공업, 건설, 무역부문 등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앞으로도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며 삼협댐 건설, 북경-홍콩간 철도복선화, 남북간 국도확충, 항만확장 및 건설, 공항확장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건설의 장기 계획뿐 아니라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문을 닫았지만 복건성(福建省) 복주 냉장고 공장은 국내 기업중 중국 최초의 진출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공장이다. 대우는 국교 수립전인 1980년대 초부터 이미 홍콩 등을 거쳐 중국시장 진출을 모색해 왔었다. 그런 노력의 첫 결실이 바로 국교수립 전인 1988년 6월에 준공된 복주 냉장고 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1987년 9월 착공 이후, 9개월만에 생산설비를 완료하고 시험생산을 거쳐 1988년 6월 13일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자본금 1천2백만 달러의 이 공장은 대우의 현지법인인 창범유한공사가 48%, 중국 복주무선전이창(福州無線電二廠)이 52%를 출자해 설립됐으며, 초기에는 2백40리터급 중․소형 냉장고를 주로 생산했다.
그러나 국내기업으로서는 첫 중국 진출로 관심을 모았던 복주 냉장고 공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5년만에 중도에 철수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중국 정치․경제의 불안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즉 진출한지 1년만에 천안문 사태라는 돌발변수를 만나 판매부진과 가격폭락이라는 악재가 이어지면서 경영난에 부닥쳤던 것이다. 물론 중국에 가장 먼저 진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 것도 큰 요인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복주 냉장고 공장은 이후 대우의 중국진출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발자취로서 평가받고 있다. 복주 냉장고 공장은 대우가 중국시장에서 일보 전진하기 위한 일보 후퇴였던 것이다.
그후 중국에 대한 대우 전자부문의 진출과정을 살펴보면 심천(1992년 8월 가동)과 천진(1993년 10월 가동)에 오디오와 카-오디오 공장을 설립하였고, 1995년에는 위해의 모니터 공장과 천진에 청소기, 전자렌지 공장(1996년 3월)을 설립하여 생산을 가동하는 등 중국정부의 구역경제발전전략과 맥락을 같이 하여 효과적으로 중국진출을 하고 있다.
특히 천진의 카-오디오 생산법인은 중국을 향한 대우의 또 다른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천진은 북경의 동쪽에 위치하여 중국의 관문 성격을 지닌 곳으로 향후 중국 내수시장 진출 및 기타 투자여건면에서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천진 카-오디오 공장은 처음 5명의 주재원으로 출발하면서 생산법인의 성패는 인원의 효율적인 관리로 결정된다고 판단하고, 어떻게 하면 중국내 현채인과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느냐를 과제로 삼아 이에 대한 실천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회사 입사와 동시에 일등 공인의 각오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또한 회사에 출근하면서 모범사원이 되기 위한 각오를 받아 게시판에 게시하였고 아침일과 시작전에 일류공장이 되기 위한 구호를 전 사원이 힘차게 외치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과시간 중에는 의자의 줄을 맞추어 항상 긴장된 가운데 업무를 진행하였으며, 불량발생시에는 호루라기를 불어 불량발생 내용을 전 라인에 통보함으로써 불량율(MA기준) 0%에 도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생산가동 1개월 전부터 종업원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공장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품질과 동시에 제일 염두에 둔 것은 ‘세계에서 제일 깨끗한 공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천진 카-오디오 공장은 해외의 바이어들로부터 유달리 ‘깨끗하고 인상적인 모습의 공장’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우인들의 남모를 노력과 희생정신이 녹아 들어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96년에는 대우전자 해외공장 중에서는 세계 최초로 중국내 한국 업체중 제일 먼저 ISO9002를 인증 받았으며, 동년 11월에는 수출입 및 내부관리 정확으로 세관으로부터 지역내 모범회사로 지장받은 바 있었다.
또한 1996년도 경영실적 결과 지역구 인민정부로부터 ‘법인자 선진기업인상’을 1995년에 이어 연속 수상하였다. 1996년을 기준으로 할 때, 천진 카-오디오 공장은 3개 라인에 연간 생산량이 60만개에 불과하지만 2000년대에는 8개 라인에 연간 150만대의 카-오디오를 수출하는 세계 제일의 공장으로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대우는 또 중국 천진에 1999년까지 5년간 총 5천만 달러를 단독투자, 연산 1백50만대의 가전제품용 모터 생산공장을 건설한다. 대우는 이를 위해 현지합작법인 「대우전기천진유한공사」를 공동설립하고 1995년 4월 천진 대항의 경제기술개발구역내 2만5천평 부지에 생산공장을 착공했다. 1995년 1차로 2천만 달러가 투입된 이 공장은 가동 첫 해인 1996년 4월부터 진공청소기 1백만대와 모터 2백만개를 생산하고 있다. 또 1997년에는 1천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 생산규모를 청소기 연산 1백50만대와 모터 3백만대로 늘릴 계획이다.
대우는 전자․전기부문에서 앞서 소개한 복주 냉장고 공장, 천진 카-오디오공장, 천진 모터합작공장 외에도 천진 에어컨공장, 천진 전자렌지공장, 위해(威海) 대우전자유한공사, 보안(寶安) 대우전자유한공사, 산동 대우전기유한공사, 연대 대우전자부품유한공사, 함양(咸陽) 대우전자부품유한공사를 설립해 생산 및 영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다른 쪽인 중국 북방지역의 가장 큰 항구도시이자 동북3성의 관문인 대련시 중심가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30분즘 달리면 1970년대 서울의 강남을 연상케하는 신시가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한창 개발 바람을 타고 있는 대련시 경제기술개발구이다.
세계 각지에서 투자한 수백개의 업체가 중국식 사회주의의 토양 위에서 자본주의의 열매를 따기 위해 여념이 없는 이 곳 중심가에 「대우(대련)가방․텐트제작 유한공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우는 1988년 이후 부산공장에서 생산하던 가방 및 텐트제품의 경쟁력 약화에 대처하기 위해 해외생산을 모색하던 중, 중국의 시장 잠재력과 저임금의 노동력, 그리고 한국과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이점에 주목하여 1991년 대련에 공장을 설립키로 결정했다.
1991년 8월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고 4백47만달러를 단독 투자해 향후 48년간 경영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세우고, 1992년 6월에 가동을 시작한 대련공장은 여행용 가방 연 45만개 3백50만 달러, 텐트 22만개 6백50만 달러 규모의 생산능력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시장상황의 변화에 따른 구조조정을 거쳐 1996년말에는 텐트 약 40만개, 1,500만 달러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고용인원은 480명 수준으로 4명의 주재원과 한국인 기술자 3명을 제외한 470명이 현지채용 중국인들이다.
1992년 6월에 생산을 시작해 첫해에 2백50만 달러를 달성한 후 매년 40-45%의 성장을 이루어 1996년에는 약 1400만 달러 매출실적을 올렸다. 여기서 생산한 제품은 전량 북미, 유럽, 일본 등에 수출되고 있고, 1997년에는 중국 내수판매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규모는 그리 큰 공장이 아니지만, 대련공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 투자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처음 중국에 진출한 많은 외국기업들이 그렇하였듯이 대련공장 역시 설립 초기에는 중국의 실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관계 규정이 매우 까다롭고, 노동자들은 회사를 ‘깨지지 않는 철밥그릇’으로 생각하는 직업관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것이 초기의 과제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00% 단독투자 기업으로서 대련공장이 설립 초기에 겪은 갖가지 시행착오와 경험은 향후 중국 투자사업을 위해 무척 값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련텐트공장은 품질이 안정되어 가고 있고, 미국 및 일본의 고급 브랜드 제품을 무난히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수준이 향상되었다. 손익측면에서도 가동 3년만인 1994년도에 흑자를 내기 시작하여 1996년까지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또 ‘세계경영’전략의 일환으로 현지인의 교육, 훈련 및 업무전산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현지인의 기술, 생산관리, 업무능력 또한 괄목할 만한 향상을 보이고 있다.

출처: 대우30년사 (1997년; 가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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