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는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중동, CIS, 중국, 서남아시아 등 가능한 모든 지역에 대한 정보수집 및 시장조사 등을 통해 진출을 모색했었는데, 그 첫단추를 끼우기 시작한 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이다.
우즈벡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해상접근로가 없는 깊숙한 내륙국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외진 곳이다. 이 곳은 소련연방 시절 면화생산에 특화되어 자동차공업 기반이 취약할뿐더러 진출을 결정한 1992년 당시는 1991년 9월 독립하여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과도기로 국가 전반이 혼란상태에 있었다. 또 제반 인프라가 정비되지 않아 객관적인 투자여건은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우는 철저한 타당성 조사 끝에 우즈벡이 지닌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우가 보기에 우즈벡은 인구 약 2천2백만명에 소득이 약 1천 달러 수준이고 자동차 보유율이 인구 천명당 45대로 우리나라의 1980년대 말 수준으로 매우 높으며 서유럽과 모스크바 등 자동차 생산지역과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등 시장잠재력이 매우 큰 나라였다.
또한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 잠재력도 크며, 특히 카리모프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정치가 CIS 국가중 가장 안정되어 있고 외국투자 유치에 최고통치자 및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등 투자 위험이 매우 적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단기적인 입장에서 EBRD(유럽부흥개발은행)도 대우의 우즈벡 진출 프로젝트에 대해 회의를 표명했지만 대우는 그들 보다 좀 더 긴 안목으로 잠재된 가능성을 읽어 내어 투자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1992년 6월 우즈벡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 특별히 창원 국민차 공장을 방문, 자동차산업 개발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1992년 8월 합작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사업 타당성 조사를 마치고 1993년 3월1일 대우 50%, 우즈벡정부 50%의 지분으로 연산 20만대의 경자동차(TICO, DAMAS, LABO)를 생산하기 위한 합작사 UZ-DAEWOO AUTO CO.를 설립하였다.
국민차로서는 창원공장 가동 불과 2년만에 도입기술을 100% 소화하고 해외로 진출하게 된 것이며, 총투자액이 658백만 달러이고 자본금이 200백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해외투자 중 최대규모의 사업이었다.
이는 그룹 자동차부문의 최초 해외 본격 진출일뿐더러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았던 중앙아시아 시장을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대우의 개척과 도전정신을 보여준 해외진출 사례였다.
한편 세계자동차산업 측면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가깝고 능력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는 유럽 및 일본의 쟁쟁한 자동차 메이커들을 제치고 중앙아시아 지역을 선점했다는 사실은 향후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가능성과 나아갈 방향을 엿보게 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장가동 2년만에 20만대의 대규모 자동차공장을 해외에 더구나 모든 여건이 열악한 우즈벡에 건설한다는 것에 대해 우려와 불안의 목소리가 많았으나 다음과 같은 전략을 마련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
첫째, 공장설계 개념을 창원공장과 꼭같은 체계로 정하여 창원공장 건설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 결과 시행착오 없이 순조롭게 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다. 둘째, 국내 자동차부품 업체의 동반 현지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미비한 부품산업 기반을 보완하였으며, 셋째 2,000여명의 합작사 직원 전원에 대해서 장기간 한국 연수를 실시하여 필요한 기술 및 관리능력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나름대로의 전략하에 공장건설을 착수 추진중에 갑자기 큰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1993년 말 우즈벡 정부가 느닷없이 생산차종 변경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즉 경자동차보다는 소형차가 더 잘 팔릴 것이라며 넥시아(NEXIA) 생산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미 프로세스(Process) 엔지니어링이 끝나고 장비 발주가 개시된 시점이라 만약 생산차종을 변경한다면 6개월간의 그간 노력을 무로 돌리고 새로 시작해야 할뿐더러 설비 변경 등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대우는 투자 철회라는 배수진을 치고 4개월간에 걸쳐 우즈벡정부와의 끈질긴 협상을 벌인 끝에, 결국 대우측 입장을 중심으로 양측이 타협하여 라보(LABO)를 제외시키고 대신 넥시아(NEXIA)를 추가하여 혼용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난관은 계획경제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의사결정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회주의권에서 사업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편 공장건설은 한마디로 무에서 시작해야 했다. 건설자재는 철재류 등 거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했고, 턱없이 부족한 건설중장비, 사회주의 체제의 타성에 젖고 타율적인 작업자들, 실행되지도 않는 구(舊)소련시대의 터무니 없는 법규 준수 요구 등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애로에 직면하여 망연자실한 적도 있었다.
특히 구소련 공업규격(GOST)이 우리나라의 KS나 자본주의의 규격과 전혀 다르며 우즈벡 현실에도 맞지 않아 그대로 따라서는 도저히 당초 계획대로 공장건설이 불가능하며 원가도 크게 상승할 것으로 판단되어 설계, 자재, 시공방법 등 하나부터 열까지 우즈벡측 표준을 수용할 수 없었다.
대우는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른다”라는 격언을 단호히 거부하고 진정한 동반자로서 구소련 표준의 불합리성과 비효율성을 설명하면서 관계인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실제 공사현장을 견학시켰다. 그렇게 설득하여 우리의 방식과 표준을 적용하여 공기와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우는 우즈벡 정부 기술관료들에게 자본주의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방식 및 표준(KS)을 심어줌으로써 향후 경제개발 과정에 있어 한국의 방식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우즈-대우 자동차공장은 단순한 해외투자 이상의 큰 의의를 지닌다.
우즈벡 정부도 이 사업이 대통령의 공약사업이고 독립 우즈벡의 상징적 사업인 만큼 줄라베코프 수석부총리가 월2회씩 공장에서 관련 장관들을 소집, 공정회의를 주관하는 등 총력을 경주하여 열과 성을 다하였다. 우즈벡 정부는 이 공장건설을 계기로 농업 및 농업기계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탈피,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자립기반 확충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운 바 있다.
또한 서방자본 유치를 통한 산업화에 주력하고 있는 우즈벡 정부는 이 공장을 외국기업의 성공사례로 제시해 기술 및 자본유치에 활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즈벡 정부는 이를 위해 5년간 매출세 및 수입관세 면제, 2년간 내수판매 보장, 자동차 할부금융을 위한 은행 설립 등 각종 지원정책을 계획 또는 실시중이다.
1996년 3월 다마스(DAMAS) 양산이 시작되었고 6월에는 티코(TICO)와 넥시아(NEXIA)를 양산하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7월 19일 역사적인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계획보다 무려 5개월을 단축한 놀라운 결과였다.
우즈-대우 공장 준공은 중앙아시아 최초의 자동차공장의 탄생일뿐더러 독립 우즈벡의 지난 5년간의 성장과 업적을 대변하는 사건으로 규정되어 준공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등 범국가적 행사로 치뤄졌으며 준공식 당일을 한-우즈벡 친선의 날(임시경축일)로 선포하여 양국간의 우호증진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벡 대통령은 우즈-대우 공장 준공 축하광고에 우정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정부도 이 사업이 양국 경제 우호협력에 기여한 측면을 인정하여 정무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파견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대우의 우즈벡 진출은 여러 측면에서 개척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현지에 국내 최초로 진출하여 우즈벡의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우 가족사 뿐만 아니라 국내기업의 진출의 길을 터 놓았으며, 10여개 자동차 부품업체의 현지진출을 주선함으로써 모기업-협력기업 해외동반 진출을 본격화했다.
한편 기술연수생 한국 수송을 위해 타쉬켄트-서울 직항로가 개설되었고 이 길을 통해 양국간의 실질적인 교류가 심화되었다. 또한 당초 우즈벡 투자와 같은 대규모 해외투자를 무모하고 위험한 것으로 보고 소규모의 단순조립 공장 위주의 해외투자 전략을 취해 왔던 국내의 경쟁사들도 이제는 대우의 전략을 쫓아 대규모 투자로 전략을 바꾸게 되었다.
좀 더 멀리 내다보고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곳에서 가능성을 발굴해 실현시킨 우즈벡 자동차 사업은 진정한 개척의 한 장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대우는 우즈-대우 자동차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넥시아, 티코, 다마스의 범퍼와 인스트루먼트 판넬 등을 생산하기 위해 1995년 1월 우즈코람(UZ-KORAM CO.)을 설립하였다. 우즈코람은 코람과 현지 정부기관인 우즈오토 사노아트가 50대 50의 지분으로 자본금 5백만달러를 들여 설립한 현지법인이다.
우즈벡 안디잔주 아사카시에 위치한 우즈코람 공장은 부지 3천4백평, 건평 2천평 규모로 연산 자동차 30만대분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1997년 2월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우즈코람이 설립될 당시 우즈벡을 포함한 주변국가들 사이에서는 자동차 구입시 흰색을 위주로 한 밝은 색상을 선호하는 유행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우즈벡의 우즈-대우에서 생산되는 차량 모두는 한국에서 공급되는 무도장 상태의 범퍼를 부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흰색 차량을 생산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수출부진을 우려한 우즈벡 정부는 도장사향 요구를 해왔는데, 신규투자를 서두르고 있던 우즈코람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기회였다. 이를 위해 우즈코람은 앞으로 부지 3천3백평을 추가 확보하여 건평을 5백평 더 늘린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대우는 또 1993년 5월 우즈벡에 우즈-대우전자(UZ-DAEWOO ELECTRONICS)를 설립하여 당해 11월부터 칼라TV와 VTR생산을 시작하여 현재는 칼라TV와 VCR 생산량이 연산 10만대에 달할 만큼 성장하였다. 우즈벡의 자국 산업을 일으키려는 일념과, 대우의 신시장 개척을 대비한 포석이 맞아 떨어진 열매였다.
1995년 3천만 달러, 1996년 5천1백만 달러의 매출액이 말해주듯이 대우가 우즈벡에 진출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996년초부터 시작된 카-오디오 생산도 본격적인 채비가 갖춰지는 1997년부터 연간 30만대 의 생산실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