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5 대우만의 고유 모델 개발
월드카 르망의 성공적인 생산에 이어 대우는 변신을 꾀하였다. 그것은 대우자동차 고유 모델의 개발이었다. 경쟁사인 현대에 비해 늦은 감은 있었으나, GM과의 공존(共存)에 따른 활발한 기술개발 투자가
월드카 르망의 성공적인 생산에 이어 대우는 변신을 꾀하였다. 그것은 대우자동차 고유 모델의 개발이었다. 경쟁사인 현대에 비해 늦은 감은 있었으나, GM과의 공존(共存)에 따른 활발한 기술개발 투자가
대우는 동급 최고의 성능과 안전도를 갖춘 차세대 소형 신차 「라노스(Lanos)를 개발하여 1996년 11월 16일부터 국내 시판에 들어갔다. 소형차의 성능과 안전도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요구에 적극
대우는 국내 최초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국민차를 생산하기 위해 1988년 3월 경자동차 생산사업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하면서 원대한 꿈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1989년 4월부터 공장건설에 들어가 1990년 12월에
대우는 국내외 250만대 생산체제를 구축하여 세계 10대 자동차메이커로 부상한다는 장기적인 자동차사업전략 아래 1990년 T-PROJECT를 전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시장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수출시장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1984년 3월, 대우는 미국 GM과 자동차 부품사업 공동추진을 위한 합의각서를 교환하고 6월 1일자로 대우자동차부품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정부의 외국인 투자인가를 획득하여 1984년
대우기전공업주식회사는, 1989년 12월 1일 대우자동차부품주식회사와 대우 HMS 공업주식회사가 흡수통합하면서 탄생된 회사이다. 그러니까 결국 대우기전의 진짜 출생일은 자동차부품공업주식회사의 설립일인 1984년 6월 1일인 것이다. 두 회사의 합병으로
대우정밀공업주식회사는 1981년 12월 19일 발족되었다. 지난 1973년 11월 준공되어 기본 소화기류를 생산하여 자주국방력 강화에 기여해 온 국방부 조병창이 새로 민영화 되면서 대우가 이를 인수하게 된
코람프라스틱주식회사는 1985년 4월 20일 대우가족이었던 주식회사 제철화학이 미국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1985년 9월 30일에 설립된 R-림범퍼, 프라스틱 범퍼, 밧데리 케이스, 휠 커버,
주식회사 한국자동차 연료 시스템은 1994년 12월 19일 충남 연기군 서면 부동리 152번지에 설립됐다. 이 회사의 설립은 대우정밀공업주식회사(51%)와 미국의 Walbro Automotive Corporation(49%)과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주)한국자동차 연료
경남금속은 1973년 12월 7일 경기도 성남시에 경남금속공업(주)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진유공예품 제조업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경남기업의 건축사업 부문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사업구조 조정을 통해 철물 공사업으로
1971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지원을 위해 전담기구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설치하고 1973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내용을 보면 중화학공업 비율을 1971년 35.2%에서 1981년에는 51%로 고도화하고 수출구조
한국기계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6월,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기계공업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공장이었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전환된 후
대우인들은 만년적자의 한국기계를 인수후 1년만에 정상화 하여 흑자기업으로 반전시켰다. 대우는 한국기계의 인수당시 120억원의 자본금을 250억원으로증자, 자본의 충실을 기하였다. 매년 10억원씩 증자해야 한다는 인수 조건이 있었지만
인수 초기 내부관리체제 혁신을 위하여 단행한 일련의 관리체제 정비작업 및 종업원 의식개혁 작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자 대우는 경영정상화 계획의 본격적인 실천작업에 착수하였다. 종래의 소량 주문생산
1976년말 산업기계공장의 시설을 재정비하여 지게차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한데 이어, 당시 중동지역 건설붐과 국내 건설사업의 활기에 힘입어 1977년 2월 일본의 히다찌(Hitachi)사와 굴삭기 및 유압 크레인 생산을
대우중공업은 한국 기계공업의 선두주자답게 ‘공작기계공업의 발전이 곧 국가공업 발전의 기반’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1976년부터 공작기계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 기계공업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분야인 공작기계 산업의
대우의 한국기계공업(주) 인수 후 경영진과 전 종업원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인수 원년인 1976년에 전년대비 100 % 이상의 매출신장을 기록하면서 만성적자 기업의 불명예를 벗고 흑자기업으로 전환되었다. 비록
1979년말에 일어난 제2차 오일 쇼크의 여파로 국제경기는 깊은 불황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외의존도가 큰 국내경기는 국제원자재가의 급등, 고금리, 국제 수요 감소,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등에
대우의 기술 파트너였던 캐터필터사는 1980년대 들어 자국내 임금상승과 사업환경의 악화에 따라 종전까지 유지해오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일본의 고마쭈사 등이 세계시장을 잠식해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기업과의
대우중공업은 1973년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이래 군용 차량에 탑재되는 디젤엔진, 지게차 등 일반제품외에도 각종 방산품을 생산 납품해 오면서 그 물량을 점차 늘려왔다. 1980~1984년에 이르는 기간은 방위산업분야에서도
대우중공업은 1977년 일본 히다찌(Hitachi)사와의 기술제휴로 굴삭기를 생산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자립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 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중장비업계는 기술개발 환경의 열악함과 경험부족으로 인하여 자립모델의 생산은
1980년대 중순부터 1990년까지 대우중공업이 그동안 추진해온 사업확장과 전략사업은 사업부제 실시 이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영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내실 위주의 경영활동을 펼친 결과,
대우중공업은 1994년 10월 1일 그룹 계열사인 대우조선공업(주)를 흡수, 합병하였다. 이것은 1989년 8월 산업정책심의회의 결정에 의한 정부의 조선산업 합리화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당시 합리화 계획의 골자는 조선
정부의 옥포조선소 건설공사 착공과 중단 우리경제는 1963년부터 추진된 5개년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1, 2차 5개년 경제개발 기간 중에는
그러나 제3차 경제개발 계획과 관련,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더 절실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노동집약 산업이자, 종합조립산업으로서 해운․기계 등 전후방산업의 파급효과가 매우 큰 조선공업은 우리실정에 적합한
대우에 의한 옥포조선소 건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다 40만평을 매립하고 육지 80만평을 정지하여 총 120만평의 대단위 조선소 부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광활한 갯벌 120만평을 개척하는 대단위
‘옥포조선소 도약의 해’였던 1981년. 연초 조직개편(4본부 8실 53부 7담당 1소 4공장 1조립장 1사무소 1출장소 3지사)을 시작으로, 조선소 건설 마무리 공사에 고삐를 당겨, 4월에는 100만톤급 제1도크를
초창기 건설공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대우는 1982년을 대우조선이 자립하기 위한 ‘경영전반의 성숙과 토착의 해’로 잡고, 생산․인원․조직․시설 등 대규모로 팽창한 살림살이를 운영하는데 지혜를 모아나갔다. 수출 1억불 탑을
전세계적으로 해운업이 계속 침체현상을 보임에 따라 그 직접적인 영향하에 놓여 있는 각국 조선소들이 자구책으로 기존시설의 감축, 생산성 향상 및 인원감축을 통하여 경쟁력을 확보해 나갔다. 다행히
시련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한 조선은 4개월 10일간에 걸쳐 실시된 패밀리 트레이닝을 통하여 자신과 회사의 현주소를 인식하고 주변을 생각할 줄 아는 인식의 대전환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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