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08 드디어 흑자 달성
대우가족의 조선살리기 운동과 창업주 김우중 회장의 옥포상주로 조선은 나날이 달라졌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들어 창사 이래 첫 월단위 흑자를 기록했다. 기술면에서의 NSC를 근간으로 공법개선과 정도관리,
대우가족의 조선살리기 운동과 창업주 김우중 회장의 옥포상주로 조선은 나날이 달라졌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들어 창사 이래 첫 월단위 흑자를 기록했다. 기술면에서의 NSC를 근간으로 공법개선과 정도관리,
대우전자주식회사의 기원은 1971년 9월2일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주식회사 내쇼날의류로부터 시작된다. 대우실업은 의류공급원의 한부분으로 내쇼날의류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점차 경공업 제품 수출여건이 변화하고 회사규모가 대형화 됨에
1983년 3월 15일, 대우전자는 국내 3대 가전메이커 중 하나인 대한전선주식회사의 가전사업 부문을 인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내수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해외 수출로 성장한 대우가 본격적으로 내수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1988년은 대우전자가 본격적으로 해외진출을 시작하고 매출 1조원(수출 6,480억원, 내수 3,640억원)을 달성하는 등 국제적 가전메이커로 발돋움한 중요한 한 해였다. 그동안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을 인수하여 종합가전업체로 성장한 대우전자는
1993년 1월 대우전자는 탱크주의를 선언한다. 이것은 2000년대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일등품질의 확보라는 판단아래, ‘튼튼하고 오래쓰는’ 고장 없는 제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의
대우통신의 근원(根源)이 된 신성전기산업주식회사는 1967년에 발족했다. 1967년 5월 인천시 북구 효성동 316-3번지에서 자본금 5백만원으로 시작한 전자기기 제조 및 판매회사로 설립, 2년후인 1969년 1월에는 대한전선주식회사에 인수되어
교환기 분야에서 도약의 기반을 다진 대한통신공업주식회사에 대우그룹이 자본 및 경영에 참여를 하게 된 것은 1980년 4월부터이다. 80년 4월 4일 대우에서 주식지분 50 %를 인수하여 자본과
1987년 및 1988년은 대우통신이 기업을 공개하고 컴퓨터, 교환기, 단말기, 통신기 및 반도체 부문등 전 사업부문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룩한 기간이었다. 1987년 5월 19일 1백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1990년 대우통신은 국내 시장의 불경기속에서 회사 매출액도 전년대비 소폭 증가한 2,110억원 당기순익은 오히려 줄어든 34억원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89년에 인수한 미국 컴퓨터 판매회사인 리딩에지사가 흑자로 전환됨에
1993년은 세계시장의 재편을 가져온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지역경제블록의 탄생 및 사정한파,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경영 환경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져온 한 해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도 1983년이래 창립 10주년을
1994년은 대우통신이 해외시장 개척과 품질혁신, 고객만족활동 활성화, 노사화합 등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한 해였다. 4월 주식분산 우량업체로 지정됨으로써 출자 제한은 물론 여신관리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에
1996년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급속한 변화를 겪은 한 해였다. 각국이 자국의 이익창출을 위해 다양하고 새로운 생존수단을 개발하는 등 국제환경이 초경쟁시대로 본격 돌입하였으며, 또한 WTO 체제의 정착과
오리온전기주식회사는 1965년 11월 22일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방전관 및 전기애자 생산업체로 처음 창립되었다. 오리온전기가 창립된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기초적인 단순조립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1969년 7월 21일, 미국의 아폴로 11호기가 인류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던 이날, 오리온전기는 산고 끝에 만든 브라운관 첫 제품을 시험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중계된 인류의
흑백브라운관의 판매신장은 컬러브라운관 사업을 진행시키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미 세계적으로는 컬러텔레비전이 보편화되어 컬러브라운관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1980년을 전후로 국내 컬러텔레비전 방영이 점차
1970년대 후반 국내외 산업계 전반이 제2차 석유파동과 정치 사회적 불안으로 급격한 경기침체에 빠져들고 있을 때, 오리온전기는 중국시장 개척에 힘입어 오히려 큰 폭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리온전기는 1988년 이후의 급속한 신장세를 바탕으로 2000천년대를 향한 중장기 경영전략인 ‘세계경영․기술오리온’ 전략을 마련하여 세계 초일류 영상디스플레이 전문회사로 도약하는 야침찬 계획을 펼쳐 나갔다. ‘세계경영’ 전략은 전세계
한편, 오리온전기는 ‘기술오리온’ 전략에 따라 기존 브라운관 경우에는 시장 추세에 발맞춰 대형화․고품위화하고, 차세대를 이끌 새로운 제품으로 LCD와 PDP, FED 등 평판디스플레이를 추가해 세계적인 종합 영상디스플레이
대우전자부품주식회사는 1973년 10월 13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 당정리 543번지에서 설립된 대한마루콘주식회사를 모체로 한다. 대한마루콘주식회사는 콘덴서 제조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일 합작투자 회사였다. 당시 초기단계에
대우가 대한전선주식회사의 가전부문 9개공장을 인수할때 대한컨덴서주식회사도 함께 인수되어 1983년 1월부터 경영권이 대우로 넘어왔다. 대우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상호를 대우전자부품주식회사로 변경하고 같은해 12월 30일에는 동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흡수합병
광주 광역시 장덕동 하남공단 내에 위치한 대우모터공업은 대우전자와 제너럴일렉트릭(G.E)사와 130억원의 자본금으로 합작 투자하여 1987년 10월 설립한 회사다. 1988년 11월 세탁기용 모터 생산을 시작으로 1990년에는 모터
금융산업 부문은 대우가 오래전부터 진출을 꿈꾸어 오던 부문이었다. 왜냐하면 대우가 지향하는 세계적인 기업은 탄탄한 자금력의 뒷받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 금융시장에서의 자금동원
대우투자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된 1973년 7월 3일은 대우 성장사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날이었다. 대우투자금융은 대우가 소유가 첫 번째 금융회사라는 점외에도, 창립 이후 인수를 통하지 않고 직접
대우증권의 모태, 동양증권의 태동 현재 국내 최대의 증권사로 발돋움한 대우증권의 모태는 1970년 9월에 설립된 동양증권이다. 동양증권은 1973년 9월 대우에 인수되어 대우가족사의 일원으로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다가
우리경제는 1972년 중에 있었던 8․3 조치와 세계경기 회복에 따른 수출수요의 급신장에 따라 상반기부터 폭발적인 설비확장과 원자재 재고투자가 증대되었다. 또 이를 뒷받침한 과잉 유동성 증대, 개인소비
대우가족의 일원으로 면모를 일신한 동양증권은 공신력 제고와 사세확장 이라는 대전제 아래 10회에 걸쳐 증자를 단행, 납입자본금을 50억원으로 늘려 동업계내에서 상위 증권회사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와
1978년 국내 증권회사중 최초로 국제부를 신설, 증권산업 국제화를 추구해온 대우증권은 1980년 10월, 한국산업은행에서 발행한 엔화 표시 채권 2,500만엔을 매출함으로써 최초로 국제영업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1984년
대우증권은 1985년 1월 4일 본사사옥을 여의도 ‘대우증권빌딩’으로 이전함으로써 새롭게 여의도 시대를 시작하였다. 여의도 시대의 개막은 정부의 자본시장 육성정책에 따른 증권관계기관의 여의도 이전 계획에 부응하여 이루어졌다.
대우는 1988년 2월 13일 자산운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대우투자자문을 설립하였다. 투자자문업은 한국경제가 고도화되고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간접투자가 일반화되고 전문적 자산운용의 비중이 커지면서 날로 성장하고 있는 사업분야이다.
대우할부금융은 1994년 1월 5일 정부가 할부금융회사 설립요건 및 영업내용을 규정하는 신용카드법을 개정 공포함에 따라 회사설립의 법적근거가 마련되어, 그해 2월 21일 우리자동차판매 주식회사가 50억원을 출자하여 한국할부금융(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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