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은 1세기에 한명이나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위인이다.
아버지 김용하, 어머니 전인항. 부모님은 모두 교육자로서 아버님은 해방 전 대구 관립사범학교 교사이며 어머님은 평북 영변 숭덕여학교 교사이다.
제주도 출신인 아버님과 평북 출신의 어머님의 만남은 기적과 같은 일로서 기독교 선교사의 중신에 의한 것이었다.
아버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스승이며 어머님은 여성 초대 변호사 이태영 여사의 스승이다.
대구 출생의 김우중은 해방 후 내가 용산 중학교 1학년때 그가 초등학생일 때 처음 만났다.
김우중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빈손으로 제로에서 수십조의 실체를 만들어내며 가치창출의 가능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는 모든 국민들, 특히 젋은이들에게 공진현상을 일으켜 오늘날 국경없는 글로벌 네트워크 시스템을 형성함과 동시에 자본, 자원이 없던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원동력을 창출한 위대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큰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중학생 때 대구에서 일간신문의 가두판매를 하며 번 돈으로 쌀을 사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갔는데 어느 날 소낙비가 내려 신문이 모두 젖음으로 그날 저녁에는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동생은 집에 있던 한 공기의 밥을 같이 먹자고 했으나 김우중은 밥을 먹고 왔다고 둘러대자 이를 눈치챈 어머니와 서로 부둥켜안고 한바탕 울었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김우중은 용기를 내고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이 세상에 도전 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대우실업을 시작하고 세계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면서 대우그룹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한가지 나와 김우중만이 아는 비밀이 있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김일성을 여러 번 만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큰 희망이 보일 때 김일성이 돌연 의문사를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김우중과 나는 북한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북한과는 손을 끊고 다시는 북한을 도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은 동행했던 부인인 정희자 회장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희자 회장은 결혼 이후 대우가 성장하는데 고비 때 마다 큰 힘을 보태주었다.
2000년대 초 김우중과 나는 대우-고합사건으로 검찰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위대한 김우중을 보낸 지금 그가 남긴 역사적 업적을 되새기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김우중회장은 언제나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과 같이 기업경영을 길이길이 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