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Kim Woo Choong

김우중 회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나는 김우중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그와 함께한 55년이 문득문득 눈앞에서 상영이 됩니다. 무시할 수 없는 긴 세월동안 함께 견딘 고통도, 함께 누린 기쁨도 있었습니다. 김우중의 아내로, 참 많은 경험을 하며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고통도 기쁨도 결국에는 고마움으로 귀결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친한 친구가 아이 백일잔치를 한다고 초청해서 친구들과 함께 갔습니다. 가서 보니 남편 쪽 동창들도 와 있었지요. 백일잔치가 끝나고 친구네 집을 나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남편 쪽 친구 중 하나였어요.

“한 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말했고 나는 그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작은 키에 안경을 끼고 있었지요. 안경 속 눈매며 얼굴이 예쁘장했어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결혼적령기를 훌쩍 지난 나이였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혼보다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안경 낀 남자에 대한 편견도 있었어요. 왠지 성격이 차가울 것 같았지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백일잔치를 했던 친구의 남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 친구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 경제과를 나와 한성실업에서 일하는 엘리트예요. 그렇게 쓱 보고 끝날 일이 아니니 한 번만 더 만나 봐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내가 시큰둥해하자 나중에는 내 친구까지 나서서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번 더 만나기로 했습니다.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나를 만난 그의 첫마디는 정말 황당했습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유학 준비를 해왔어요. 조만간 떠날 거예요. 그러니 결혼 같은 것은 할 수도 없고 사실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교육을 우선으로 여기는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당신이 공부 욕심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듭니다. 나 역시 계속 공부를 하고 싶소. 다행히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가 조만간 미국에 지사를 설립할 것이니 결혼 후 그때 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면 어떻겠소?”
나는 그를 다시 보았습니다. 사실 마음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 갈망을 현실로 이룰 방법으로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눈치채셨겠지만, 그는 내 남편 김우중 씨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김우중 씨는 참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유학을 가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나의 결혼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됐습니다. 아이들을 혼자 돌봐야 했고 집안일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집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오늘 세 명이야.”
“오늘은 네 명이야.”

남편의 이 한마디는 오늘 집에 올 손님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 숫자에 맞게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아이 넷을 키우며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엄마, 오늘 또 손님이야?”

아빠한테 전화만 오면 큰 애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나는 좁은 목욕탕에서 애들 네 명을 씻겨서 머리를 빗기고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방으로 쫓아내듯이 들여보내고 상을 차렸습니다. 손님들이 가시고 상을 치우면서 내심 남편의 위로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위로 한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은 점점 커져가고, 다툼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사업을 한다고만 하지 않았다면 가출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선재를 낳고 산후 몸조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는 겨우 걸음마를 하는 첫째 선정이와 이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둘째 선재를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남편이 친구와 동업으로 회사를 차린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만류했는데 남편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가출은 아내들이 사용하는 최후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마음을 돌릴 줄 알았습니다. 나는 남편이 착실한 샐러리맨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얼마나 사업이 힘든 건 줄 알기에 어렸을 때부터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가출을 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촌 여동생 집에 있던 나는 남편에게 이끌려 2주 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곧 남편은 자본금 500만 원을 가지고 직원 5명과 함께 대우실업을 창업하고 말았습니다. 대우그룹의 시작이었습니다.

“엄마, 돈 1,000만 원만 줘.”

남편은 나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여보’라는 말은 쑥스러워 못하니, 별다른 호칭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니 그렇게 불렀습니다. 가끔 ‘정희자 씨’라고 부르긴 했지만, 대부분은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남편은 아무래도 자금이 부족하니 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무슨 돈이 있나요. 지금처럼 금융업이 발전한 때가 아니었으니 사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정식으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을 수 있는 시절로 바뀌면서 돈을 꾸러 다니는 생활이 끝났습니다.

대우실업은 스웨터를 짜고 와이셔츠를 만들어서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미국 시어스 백화점에도 납품을 했습니다. 품질이 좋아서 계속 주문이 늘고 계약서가 쌓여갔습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난관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부산 공장에서 공장 직원들이 출입할 때 몸수색을 했습니다. 옷감이나 부자재 등 도난방지를 위한 일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느끼기에 조금 과도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직원들이 파업을 하고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나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애가 탄 남편이 나보고 대신 가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보리쌀 한 되를 사서 들고 그의 집을 두드렸습니다.

“선정이 엄마예요.”

그의 얼굴도 나의 얼굴도 휑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공장에 다시 나와 일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우리 같이 살아야지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의 눈물 어린 설득에 마음이 돌아섰는지 직원들이 파업을 곧 끝내고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내 일이 많아졌습니다. 남편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내게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남편은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이제 가족이 함께 일하는 시대가 온다는 걸 해외에서 보고 느껴서 주부사원 공채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대졸 여직원을 채용했고, 성별이 다르다고 보직을 차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일환으로 저에게도 일자리가 주어진 것이지요.

회사는 점점 번창했고, 나는 해외 수출 관련 업무도 하게 되었습니다. 해외 수출을 위해 새로운 나라에 진출할 때 남편이 먼저 다녀옵니다. 그리고 나를 보냅니다. 나는 현지로 가서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상을 파악하고 남편에게 알려줍니다.

“알았어.”

내가 많은 말을 해도 남편은 한마디 대답으로 끝납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고맙기는 합니다. 나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하니 꼬치꼬치 묻지 않고 바로 수긍해주었던 것이니까요. 남편은 내가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내게 맡겼습니다. 호텔과 문화와 미술에 관한 것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결국 일을 하느라 가정에 무심했던 남편을 따라 저도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정에 무심할 수는 없으니 제가 더 바빴던 것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애틋한 부부의 정을 쌓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가장 애틋했던 것은 남편이 영원히 떠나기 전, 병원에 누워 있었던 1년입니다. 우리 부부가 평생 한 스킨십보다 병원에서 했던 스킨십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환자로 입원해 있던 남편은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귀도 잘 안 들렸지만 내가 오면 그렇게 반가워했습니다.

“엄마, 왔구나!”

남편은 아이같이 반가워하며 해맑게 웃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이 가엽고 애틋하여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볼과 이마에 뽀뽀하고 안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병실 로맨스가 꽃을 피웠다고 놀렸습니다. 그러게요, 왜 그 젊은 시절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시간이 더 많았을까요? 다 지나고야 깨닫는 것이 너무 많아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이 야속합니다. 내가 그렇게 기다릴 때 오지 않았던 남편은 병실에 누워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병원을 떠나면 “엄마, 이제 언제 올 거야?” 하고 날짜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며칠을 못 가면 간호사들에게 엄마 언제 오느냐고 몇 번씩 묻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자주 병원에 갔습니다. 누구보다 남편이 걸어서 퇴원하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이 딱 맞았습니다.

요즘은 그와 함께한 55년이 문득문득 눈앞에서 상영이 됩니다. 무시할 수 없는 긴 세월동안 함께 견딘 고통도, 함께 누린 기쁨도 있었습니다. 김우중의 아내로, 참 많은 경험을 하며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고통도 기쁨도 결국에는 고마움으로 귀결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생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려나요? 그렇다면 김우중 씨에게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김우중 씨, 일을 조금만 덜 사랑하고 가족과 조금만 더 많은 시간을 보내줘요. 꼭 부탁할게요.”

이문근
1992 이란

주요 연혁

1964 김우중과 결혼
1967 대우실업 창업
1980 거제도 학교 준비
1982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 개관
1989 김일성 주석 첫 대면
1990 큰아들 선재의 죽음
1991 세계축구선수권대회 참석
1991 경주힐튼호텔 개관
1991 경주선재미술관 개관
1995 숙명여대 명예박사학위 수여
1996 선재아트센터 개관
1996 중국 옌볜대우호텔 개관
1998 베트남 하노이대우호텔 개관
1999 제31회 신사임당상 수상
1999 대우그룹 해체
2005 남편 김우중 회장 귀국
2011 부산국제영화제 공로패 수상
2012 몽블랑 예술후원자상 수상
2019 남편 김우중 회장 영면

글쓴이

정희자

1940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 27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유년 시절을 경주에서 외할머니와 보냈다. 경주여중고,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의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던 샐러리맨 청년 김우중을 만나 1964년 결혼하였다. 2019년 그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55년을 함께 살았다. 1984년 서울힐튼호텔 회장에 취임하여, 김우중의 아내가 아닌 호텔 경영인 정희자로서, 호텔이 채권단에 넘어가는 순간까지 호텔경영에 몰두하였다. 경주힐튼호텔, 옌볜대우호텔, 하노이대우호텔을 건립하였으며 불가리아 소피아 쉐라톤호텔, 알제리 인터내셔널 알제호텔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대우 부도 사태 때 자식처럼 키워온 서울힐튼호텔이 매각되는 고통과 사랑하는 두 남자, 남편과 큰 아들 선재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 김우중과의 사이에 3남 1녀 선정, 선재, 선협, 선용을 낳았다.

1995년 숙명여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제31회 신사임당상, 2011년 부산 국제영화제 공로패, 2012년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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