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김우중 회장님을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두 개의 ‘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두 개의 심이 무엇이냐면, 첫 번째는 ‘열심’입니다. 회장님을 이야기하는데, 열심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대우의 임원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그건 다 회장님을 따라한 것입니다. 뭐, 아무리 따라 해도 그 열심을 그대로 흉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김우중 회장님은 이동할 때만 주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연회 때도 이야기하셨습니다. 비행기를 타거나 이동하면서 자는데,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잘 때가 많다고. 일에 완전히 심취되어 계셨습니다. 속된 말로 일에 미쳤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회장님이 그런 분인데 우리가 열심히 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습니까? 그때만 해도 요일이 ‘월화수목금금금’이라고 할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미덕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미덕을 좀 흉내내려고 애쓰다가 힘이 좀 들었죠. 제가 신혼 때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도 없이 매일 회사에 갔습니다. 하루는 장모님이 오셨는데 역정을 내셨어요.
“자네, 내 딸하고 결혼했나? 회사하고 결혼했나? 나, 가네.”
장모님 가시는 뒷모습을 보며 어찌나 죄송하고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일을 느슨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회장님 이하 임원들 모두 일에 심취해 있고, 매일 일 생각만 하던 때였으니까요.
2009년도에 대우조선해양이 100억불 수출을 했습니다. 무역의 날, 남상태 사장이 100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지 않았습니까? 단일 조선소가 100억불을 수출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잖아요. 조선뿐이 아닙니다. 자동차도 그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잘하고 있었고, 굴삭기, 지게차 같은 중장비, 이런 것들도 다 우리 회사 제품이 최고 명품이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인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도 참 인정을 받았던 건 분명하거든요. 그런 쾌거들이 열심을 빼놓고 이룰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기술이라는 것이 열심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도 참 아쉬운 게, 항공사업입니다. 헬리콥터를 포함한 항공우주사업에 대우 이름을 달고 조선의 기술, 자동차의 기술, 중장비의 기술을 합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대우의 명성이 첨단 항공분야에도 닿을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습니다. 그러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회장님의 ‘열심’을 이야기하다가 저의 아쉬움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네요. 다시 방향을 제대로 잡겠습니다. 회장님의 ‘열심’은 참 존경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열심’이 이룬 것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두 개의 ‘심’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나머지 하나의 ‘심’은 진심입니다. 대기업의 총수일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진심도 총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6.29선언 이후 자유화 물결을 타고, 각지에서 노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우조선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노사분규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사실 그때만 해도 기본적으로 노동법이나 행동 단체교섭 등을 정확하게 알고 노동운동을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로자들이 회사에 대한 불만을 표현은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나 가준도 잘 모르니 기물 파괴가 많이 일어나고, 동료 간의 갈등도 너무 컸습니다. 현장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끼리도 서로가 맞지 않으면 노동운동을 하고, 조합을 결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행동 방향이 맞지 않으면 금세 등을 돌려버리는, 참 안타까운 시절이었습니다. 저하고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격렬한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노동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하다 보니 기물 파괴 등 여러 가지 위법을 저질러서 수배가 떨어졌습니다. 이 친구를 검거하러 노동부의 근로감독관과 형사가 왔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죠.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대와 상황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지,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장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어요.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대우 가족이라 생각하셨고, 노동운동을 하느라 받은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느라 애쓰셨어요. 그래서 제가 ‘진심’의 총수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선 아까 말씀드린 제 친구는 회장님의 배려로 다시 복직을 했습니다. 그때 당시 대우조선해양에서 자동차 AS를 담당할 사원들도 모집해서 교육을 시켜서 대우자동차에 파견을 보내고 그랬습니다. 이 친구도 대우자동차에 파견을 갈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배려 수준이 아니라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대우자동차 서울 역삼 정비사업소 공장에 사장으로 가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 외에도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다 온 직원들에게도 회장님이 인간적인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자기가 원하면 옥포 현장이나 다른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시거나 사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또 다른 그룹 계열사로 가고자 하면 계열사로 전환배치도 해주셨죠. 사실 노동운동은 경영진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친구들도 그랬겠죠. 하지만 나중에는 회장님이 진심을 다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니까 그 친구들도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졌습니다.
사실 회장님이 현장에 상주 하실 때는, ‘열심’과 ‘진심’을 함께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각 부서 단위로, 담당 단위로 간담회를 자주 가지고, 교육생들과 ‘경영자와의 대화’ 자리를 만들어 직접 말씀을 하셨어요. 게다가 근로자들하고 식사도 같이했거든요. 식당마다 돌아가시면서 근로자들하고 식사를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셨죠. 몇 명을 뽑아서 보여주기식으로 한 게 아니고, 본인이 발품을 팔아 전직원과 함께 하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저희가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만 하셨다면 저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열심 안에 진심이 들어있으니 저희의 마음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중간관리 임원들도 회장님을 믿고 같이 해보자고 움직였고, 노사분규 때도 화해 노선으로 움직였습니다. 모두가 다 그런 마음이었던 건 아니겠지만, 근로자들의 한 60%는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분규로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열심’과 ‘진심’은 끝까지도 참 빛이 났습니다. 팔순이 되시던 해에 경제적 재기는 안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YBM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청년들의 해외 사업가 양성 지원 사업에 몰두하셨지요. 얼마나 열심히 나라와 회사와 사람을 사랑하시는지,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장님 떠나시는 길에 인사를 못 드렸는데, 이 지면을 통해 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저는 81년도 대우조선에 입사를 해서 34년간 대우조선과 대우조선 협력사인 녹산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권수오입니다. 회장님! 2014년도에 제가 먼발치에서 뵈었을 때 80년대 대우조선 정상화를 위해서 계시던 모습보다 많이 늙으셔서 정말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시란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그 말씀을 미처 못 드리고 작별을 했네요. 회장님께서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누구보다도 더 대우그룹을 세계에서 제1위 그룹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그 열망이나 희망이 무너졌을 때 참 실망이 크셨지요? 그래도 회장님의 ‘열심’과 ‘진심’은 정말 빛났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를 비롯한 참 많은 대우 가족이 그 모습을 본받았습니다. 대우실업부터 대우조선과 대우그룹이 있기까지, 회장님이 세우신 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도 대우조선 입사하고 회장님 덕분에 오늘날 결혼해서 두 아들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회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