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Kim Woo Choong

김우중 회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식사는 언제 하나요?

“호구지책으로 지난 37년간의 기자 생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평생 기억할만한 사람들을 꼽으라면 저 역시 몇 안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은 단언코 김 회장님입니다.”

  ‘VSG(Vietnam Study Group),’ 이 약어를 기억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소모임의 한 분은 작년 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로 김우중 회장님이십니다.

  호구지책으로 지난 37년간의 기자 생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평생 기억할만한 사람들을 꼽으라면 저 역시 몇 안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은 단언코 김 회장님입니다.

 세 차례의 베트남 특파원 생활을 통해 맺은 회장님과의 추억거리는 솔직히 너무 많습니다. 기자와의 관계를 언급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입니다.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하지 말라는 일종의 조언입니다. 평생을 기자로서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나름 항변할 것도 있지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세평으로 이해합니다. 

 회장님과의 인연은 처음에는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도하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나이와 직업을 초월한 ‘친구’ 사이로 변했습니다.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저는 친구 사이로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이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면서 고인과 50 차례 이상 만났으면서도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보도 불가) 원칙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특종 욕심이라는 기자의 속성이 발휘될 때도 많았지만, 정치외교적인 후폭풍을 고려할 때 보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과 약속 고수 덕에 고인과 수많은 만남과 추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VSG라는 소모임을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트남을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초빙해 의견을 나누자는 공감대에서 비롯됐습니다. 

 ‘번찌 벙커'(고인의 하노이 터전인 번찌 골프장)에서의 ‘새벽볼 보기운동'(별이 아니라 볼이다. 고인은 새벽 5시에 9홀 라운딩으로 하루를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한 후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것 저것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터에 제안을 했습니다. 베트남 사정에 해박한 전문가들을 모시고 주어진 주제뿐만 아니라 이것 저것을 물어보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 어떠냐고 회장님의 의향을 여쭤봤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긍정적인 반응이더군요. 월 한 차례에 하기로 하고,  초청강사와 주제는 제가 정해오면 조정하겠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초청강사에 대한 사례에 대해서는 말꼬리를 흐르시길래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오매불망 회장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사례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과 함께.

 그렇게 해서 2010년부터 10여 차례 VSG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 참가자는 통상 회장님, 저 그리고 초청강사 세 명이었습니다. 첫 모임의 주제는 <베트남 농업의 현주소와 문제점 그리고 미래 비전>이었습니다. 초빙 강사는 하노이 외곽의 한국 농진청 직영 해외농업기술개발(KOPIA)센터장이던 C 박사였다. 정년퇴직 후 하노이에서 제2의 인생을 살던 C 박사는 후덕한 성품에다 베트남 농업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점심을 겸한 VSG 첫 모임에서 회장님은 엄청난 화력을 발휘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전준비작업을 하신 것처럼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C 박사의 당황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때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의 총수라는 데서 비롯된 부담감보다는 기습 질문에 대한 당혹감으로 기억합니다. 어쨋든 3시간이 넘는 첫 모임에 회장님도 기대치 이상이라는 평가를 내놓으셨습니다.

 두 번째 VSG의 초청 강사는 베트남에서 한국식품 위주의 소매유통업체를 운영 중인 K회장이었습니다. K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설적인 사업가(현재 베트남 전역에 200개 가까운 직영매장을 운영하는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매김했으니까요).  베트남에 진출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해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한국인삼 덕에 기사회생한 K회장을 모신 자리에서도 김 회장님은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열띈 강의와 토론을 마친 후 김 회장님은 K회장의 매장을 직접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하노이 매너 아파트 단지 매장에 들렸습니다. 김 회장님은 매장을 둘러본 후 필요한 생필품들을 구입했습니다. 때마침 매장에서 있던 일부 한국 교민들은 김 회장님을 알아보고는 인사와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하기도 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VSG 특강은 각각 베트남 금융시장 현황과 거시경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앞선 모임에서처럼 회장님의 날카로운 질문에 초빙강사들은 진땀을 내기가 일쑤였습니다. 이외에도 교육, 건설, 전자 등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대학원 박사 과정을 능가할 정도로 고강도의 특강을 진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간혹 특강장은 번찌 벙커 대신 하노이 대우호텔 내 중식당(실크로드)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식당 내 룸에서의 일부 특강은 점심 심 시간을 두 시간이나 훌쩍 넘긴 논스톱(nonstop)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만큼 열기는 후끈거렸습니다. 하지만 호찌민에서 특강 때문에 새벽 일찍 올라온 일부 강사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강사들은 저에게 쪽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쪽지 내용은 예상대로 였습니다. “회장님께 점심식사는 언제 하는지 여쭤봐주세요.”

 당연히 모임의 간사인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장님, 식사하시고 하시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그제서야 김 회장님도 반응을 보였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강사님들 시장하시겠네. 이제 주문하시죠…”

 돌이켜보면 VSG 특강을 통해서 몰랐거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베트남의 실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취재와 기사 작성에서도 이 특강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초빙강사들도 한결같이 회장님의 식견에 감탄사를 늘어놓았습니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질문과 지적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였습니다. 일부 초빙강사들은 이후에도 회장님과 친교를 맺어 수시로 도움을 주고 받은 것으로 압니다. K회장처럼 일부 초빙강사들은 고인의 ‘역작’인 GYBM 출신을 우선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작년 12월 회장님의 서거 소식에 하노이에서 근무하던 저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주신 분들도 VSG 특강 멤버들이었습니다. 현지에 계신 분들은 번찌 벙커에 빈소를 마련하자는 의견을 내 현지 관계자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VSG 모임은 역사 뒤로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핵심인 김 회장님의 서거 이후 정례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데는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꿈에서라도 다시한번 VSG 모임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회장님, 시간이 너무 지났습니다. 초빙강사님들이 많이 시장한 것 같습니다. 주문 받을까요?” 

글쓴이

김선한 국장

연합뉴스 김선한 국장은 1961년 경북 영덕 출신으로 경주고. 경희대 영어과와 연세대 대학원(정치외교)을 졸업한 저널리스트로 연합뉴스 인터넷뉴스부장과 마케팅본부장 및 동남아총국장과 대기자를 역임했습니다. 한국 저널리스트로는 드물게 미국 특수전사령부(USSOCOM)에서 연수한 특수전(비정규전) 연구 분야의 전문가. 베트남에서 2003년부터 2020년까지 세 차례 특파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저서로는 <람보와 바로: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 <X>, <베트남 리포트>, <아시아의 작은 호랑이 베트남>, <베트남을 通하다> 등 14권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2012년 베트남 정부로부터 한국과 베트남 간의 외교갈등 해소 지원 등을 인정받아 외신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최고우호훈장을 수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