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Kim Woo Choong

김우중 회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아버지의 낡은 가방이 되고 싶었죠

“그 낡은 가방이 부러웠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아버지와 항상 같이 다니잖아요. 어릴 적 보았던 만화 같은 상상이지만, 낡은 가방이 되어 아버지와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버지가 가족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저는 가족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가족이네요. 안녕하세요. 김우중 회장님의 둘째 아들, 김선용입니다. 괜히 쑥스럽네요. 하지만 훌륭한 분들과 함께 책을 통해 아버지 이야기를 전한다는 건 참 뿌듯하고 감동적인 일이니 동참해야지요.

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함께 따라오는 단어가 두 가지 있어요. 바로 ‘검소’와 ‘겸손’입니다. 검소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지만, 아버지의 삶을 보면 저절로 배우게 되는 덕목이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저도 아버지처럼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게 뿔테 안경과 가방이에요. 뿔테 안경도 그렇지만 가방이 더욱 인상 깊었죠. 출장을 워낙 많이 가시니까 출장 가실 때 인사를 하면 항상 그 가방에 눈길이 갔어요. 정말 낡아 있었거든요. 한번 쓰시면 최소 10년 이상은 쓰셨던 것 같아요. 완전히 낡아 버튼이 잘 잠기지 않을 때까지 쓰셨죠.

어찌 보면 저는 그 낡은 가방이 부러웠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아버지와 항상 같이 다니잖아요. 어릴 적 보았던 만화 같은 상상이지만, 낡은 가방이 되어 아버지와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같은 맥락에서 아버지의 비서도 부러웠어요. 가끔 아버지가 출장을 갈 때 같이 가자고 하시면 하늘을 날 듯이 좋아했죠. 간혹 비서가 함께 가지 않는 일정이 있으면 제가 비서 놀이를 했어요. 제가 비서 대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거죠. 호텔에 딱 도착하면 가방을 열어서 정리했어요. 셔츠는 장롱 안에 두고, 세면도구는 욕실에 가지런히 놓고, 칫솔은 컵에 꽂아 놓고… 아버지가 나가실 때는 빨리 가서 문 열어 드리고… 이런 게 저에게는 너무 신나는 놀이였어요. 다 커서도 아버지 따라다니는 건 여전히 즐거웠어요. 기회만 되면 따라다녔죠. 한참 동유럽에 대우 자동차가 진출할 때 제가 대학생이었는데, 그 때도 자동차 마케팅 회의를 따라다녔죠. 아버지 옆에서 막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수첩에 적으면서요. 저는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무조건 좋았는데, 아버지도 좋기를 바랐나 봐요. 함께 다니면서 열심히 배우고 아버지에게 도움도 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거죠.

아버지와 출장 이야기를 하면 평양을 빼놓을 수 없죠. 시기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요. 그때 북경을 통해서 평양에 들어갔죠. 한 일주일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을 보실 때는 김창호 사장(김우중 회장 수행비서)이랑 같이 금강산도 다녀왔어요. 영빈관 같은 곳도 가 보고, 영화관에 가서 북한 영화도 봤죠. 아버지가 시간이 나서 함께 백두산에 갔어요. 백두산 천지를 보는데 꿈같더라고요. 구름이 산을 두르고 있는데,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죠. 하지만 마무리는 아름답지 않았어요. 제가 김창호 사장이랑 함께 탔던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거예요. 산에서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차가 한 번 붕 떴다가 떨어졌죠. 너무 놀랐는데, 다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가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주고 갑자기 차를 타라고 해서 탔는데,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죠.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가 워낙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씀을 잘하시니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어요.

아버지와 출장을 함께 다닐 때마다 인상 깊었던 건 항상 아버지는 양말을 직접 빠신다는 거예요. 저랑 갈 때만 그런 게 아니라, 비서와 갈 때도, 언제나 직접 빠셨다고 들었어요. 몸을 굽히고 양말을 빠는 뒷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네요. 제가 기억을 다 하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 많았어요. 검소와 겸손을 말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는 모습이요. 자식이 보아도 그런 모습이 참 좋고 존경스러웠는데, 제가 똑같이 닮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항상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 복장 이야기를 하면 되겠네요. 아버지는 언제나 복장이 똑같으셨어요. 안에는 흰색 와이셔츠를 입으시고요. 구두도 똑같았지요. 옷장도 열어보면 똑같은 옷만 걸려 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런 건 아버지 영향을 좀 받았는데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제 복장 이야기를 해요. 저희 학교 체육복이 있었는데, 초록색 줄무늬로 된 옷이었어요. 제가 줄곧 그 옷만 입고 다녔거든요. 어머니는 남들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갈아 입고 다니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옷이 좋았어요. 굳이 다른 옷을 입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닮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도 그랬어요. 유학을 가서 매점에서 일했거든요. 콜라 캔을 모아 슈퍼마켓에 팔아서, 그 돈으로 용돈을 쓰기도 했고요. 라면이나 콜라 등을 자판기에서 뽑아 먹으면 비싸니까, 제가 저렴한 곳에서 많이 사 와서 기숙사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장사하는 모습도, 검소하고 겸손하게 생활하는 모습도 닮고 싶었죠. 아버지의 삶이 어린 저의 눈에도 좋아 보였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가장 좋아 보이는 건 따로 있었죠. 집에 계시는 아버지였어요.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저는 집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좋았어요. 자주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출장을 가시지 않고 서울에 계셔도 집에는 대부분 늦게 들어 오셨어요. 아주 가끔 일찍 들어오시는데, 그럼 아버지가 움직이는 순서는 항상 같았어요. 우선 씻고 거실로 오셔서 과일을 드시고, 담배를 피우시고, 텔레비전을 보시죠. 그럼 저는 아버지 주변에 서성거리면서 앉아 있고 놀고 했죠.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냥 아버지가 집에 계시고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주변에서 노는 게 좋았어요. 그때 밖에는 아버지를 못 보니까요. 학교 끝날 때 데리러 오실 리도 없고, 학교에 학부모들이 오는 행사가 있어도 아버지를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 그래도 한 번은 오셨네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학예회를 할 때 사회를 봤어요. 강당에서 했는데, 뒤편에 학급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오셔서 관람을 했죠. 어머니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버지들도 몇 분 계셨지만,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오실 리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회를 보다가 문득 뒤편을 보니까 아버지가 계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고 좋아서, 사회를 보다가 말고 저도 모르게 “아빠!”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부끄러운 순간이고, 사회자의 큰 실수인 건데, 그때는 마냥 얼마나 좋았는지… 헤벌쭉 웃었죠. 금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진행을 했지만요. 그 시절 그 아이의 마음으로는 정말 아버지와 함께 있는 낡은 가방이 되고 싶을 만도 하죠?

아버지는 ‘2세 경영’을 안 하시겠다고 고집하셨잖아요. 사실 그렇게 고집하시지 않으셨으면 저는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다녔을지도 몰라요. 대학교 때도 우리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기도 했고, 아무래도 조금 수월할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그런 생각은 안하시더라고요. 다른 길을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인턴을 했죠. 그 이후에도 우리 회사 말고 딴 데 가라고 하셨고요. 못내 서운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버지의 결정이 정말 지혜로웠다고 생각하고, 그때도 ‘2세 경영’을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던 거죠. 지금도 아버지의 비서를 하셨던 어른들과 연락도 자주하고 친하게 지내는데, 제가 그러거든요. 제일 부러웠던 게 아버지 비서라고. 그런데 그분들도 너무 좋은 분들이라, 아버지 옆에 그분들 대신 제가 있는 것 보다 그분들과 아버지와 저도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그러려면 정말 낡은 가방이 될 수밖에 없었겠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아버지를 참 좋아했네요. 하지만 정작 편찮으실 때는 불효를 했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제가 영화를 하겠다고 계속 싸웠거든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워낙 의외였을 거예요. 제가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다 놀랐으니까요. 모범생처럼 좋은 길만 찾아가고, 안정된 선택을 주로 했던 사람인데, 영화는 그런 길이나 선택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영화를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니 아버지도 이해를 하기는 쉽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진심이었거든요. 저는 진실도 중요하지만 진실보다 진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저의 진심을 깨닫게 되니 굽힐 수 없더라고요. 진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가, 여러 가지 오래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영화를 되게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사실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영화라는 매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영화는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영화 하는 사람들끼리는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이 일을 한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해서도, 대우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 사람으로는 안 보이거든요. 그래서 더 그러셨나. 아버지는 계속 반대를 하셨어요. 결국은 승낙을 하셨지만요.

“해 봐라.”

이 세글자가 얼마나 좋았는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출장을 갈 때 저를 데리고 가실 때가 제일 좋았어요. 두 번째로는 저를 안 데리고 가셔도 일본으로 출장을 가시면 좋았어요. 일본으로 가시면 장난감을 사가지고 오셨거든요. 그 당시에 함께 계셨던 이동호 사장님이 어떤 장난감을 사면 되는지 적어주시고, 아버지가 그걸 사오신 거죠. 그 장난감을 받아 들 때 그렇게 신이 났죠. 세 번째로는 이 세글자죠. 그 두 번을 합친 것만큼 좋은 세글자였죠.

저는 그 세글자를 듣고, 영화 일을 하고 있어요. 자식들이 다 그러려나, 어쩌면 아버지가 그 세글자를 말씀 안 하셨어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듣고 하는 것은 뭔가 더 당당하고 좋죠. 언젠가는 아버지에 대해 할 말을 담은 영화도 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가장 중요한 소품은 낡은 가방이 될 수도 있겠네요. 양말을 빠는 장면도 넣고요. 아마 그러면 허구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대우 회장이 무슨 양말을 직접 빨았겠느냐고요. 하지만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겁니다. 원래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요. 정말 그런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글쓴이

김선용

막내아들.

어릴 적엔 아버지를 따라다니고 싶어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놓은 길을 따라가며 아버지를 마음 속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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