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ing Kim Woo Choong

김우중 회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저는 회장님의 기록가 ‘미스터 리’입니다.

“김 회장님이 제 옆에 앉으셨습니다. 정 회장님이 카메라를 들고 김 회장님과 저를 찍어주셨습니다.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서 눈을 감은 채로 찍혔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회장님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니까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회장님을 기억하는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감사하나 자격이 안 되는 것 같아 안할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 올라오는 그리움을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어떤 에피소드를 적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회장님이 자꾸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회장님의 기록가 ‘미스터 리’입니다.

회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1985년부터 2000년도까지 쉬지 않고 회장님을 따라 다녔으니 짧지는 않은 세월이지요. 1984년 10월 대우전자 사외보 ‘삶과 꿈’에 사진 담당으로 입사하고 다음 해에 대우기획조정실 2부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대우기획조정실 스튜디오에는 각 회사별로 담당 사진사가 있었습니다. 무역, 건설, 중공업, 자동차, 통신… 그런데 회장님 전속 사진사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한 사람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진사가 6명이었는데, 너도 나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선 회장님의 사진을 찍는 건 표시가 안 납니다. 제품이나 기업 활동을 찍어야 표시가 나지, 회장님 사진은 보도 자료로만 나가고 생색이 안 나지요. 그리고 늦게 끝납니다. 회장님 출근하실 때 출근해서, 회장님 퇴근하실 때 퇴근을 하는데, 회장님은 항상 늦으시거든요. 게다가 어렵습니다. 회사의 제일 높은 어른을 수행하며 사진을 찍는 일인데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고, 막내인 제가 지명이 되었습니다.

회장님을 처음 기록한 것은 1985년 가을입니다. 미국 키신저 박사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회장님과 만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회장님의 모습을 기록하면 되는데, 그게 참 어려웠습니다. 회장님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카메라를 대면 피하십니다. 저는 찍어야 하는데, 회장님은 피하시니 괜히 제가 회장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소심하게 피해 있다가 다시 찍고 찍다가 피해 있고 그랬습니다.

회장님의 기록가가 된 이후로 매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보통 새벽 6시에 조찬 모임을 하십니다. 그럼 저는 5시 30분에 미리 가서 준비합니다. 조찬 모임이 끝나면 회사로 오십니다. 회사 일을 보고 6시경에 퇴근을 하시면 저녁 만찬이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럼 저는 또 따라가서 사진을 찍고 집에 가면 새벽 2시나 3시가 되었습니다. 샤워하고 잠깐 눈 붙이고 또 출근입니다. 차를 타고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일이 나니까 시간을 잘 맞출 수 있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외국도 나갔습니다. 회장님이 가시니 저는 그림자로 따라가야 합니다. 이탈리아 월드컵 때 처음 해외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렸는데 어찌나 설레는지, 그날 밤은 잠도 잘 안 왔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국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 이후로는 끄덕하면 해외 출장이었습니다. 저는 해외에 도착해서 회장님이 일정을 시작하면 사진을 찍고 나와서 우선 화장실 위치를 알아봅니다. 엘리베이터 위치도 알아두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고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층은 어떤 버튼을 눌러야 갈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어떤 건물은 L(Lobby)이 우리가 들어왔던 곳이고, 어떤 건물은 G(Ground Floor)가 그렇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너무 헷갈려서 회장님을 헷갈리게 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매번 미리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외국 출장을 갈 때 수행비서도 함께 가긴 했지만 수행 비서는 호텔에 상주해야 합니다. 무선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곳에서 본사, 해외지사들과 연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 일정이 시작되면 제가 수행비서를 겸합니다. “화장실이 어디냐?” 물으시면 바로 가르쳐드릴 수 있도록, “가자.” 하시면 엘리베이터로 안내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합니다.

오랫동안 회장님 곁에 있었으니 회장님과 가까웠냐고 물어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회장님께 어떤 감정을 가지기는 어려웠습니다. 그저 하늘 같은 분이고, 나는 하늘의 사진을 찍는 땅이니까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우러러 보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니 가까워질 계기가 생겼습니다. 회장님께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큰아들을 갑작스럽게 하늘로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김포공항에서 시신을 인도받아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안산에 있는 농장에 묻고, 봉은사에서 49제를 드렸습니다. 대우 해체 후 그 땅에 도로가 나서 묘를 옮겨야 했습니다. 화장해서 뿌렸습니다. 그 과정을 기록하며 회장님 가족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슬픔을 함께 나눈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끈끈한 연대감이 생겼습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정희자 회장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와이셔츠 상자에 양복 원단과 금일봉을 넣어 주셨습니다.

“미스터 리, 너무 고생했어요. 매번 사진 찍으며 양복 무릎이 나오고 엉망이던데 내가 아들 주려고 영국에서 사온 양복 원단인데, 좋은 원단이니까 이 원단으로 양복을 하나 해서 입어요.”

상자 안에는 큰 금액이 들어있었습니다. 내 월급이 28만원일 때입니다. 대우빌딩 옆 엘지빌딩 지하에 가면 양복을 10만원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10만원 짜리 양복을 사고 나머지는 돌려드려야 하나, 이 큰돈을 받아도 되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장님 비서에게 고민을 얘기했습니다.

“회장님이 양복을 잘 모르셔 힐튼호텔 2층 양복점에 가셔서 이 원단으로 양복 맞추려면 얼마나 드냐고 물어보셨어요. 거기서 그 금액이라 해서 넣은 것이니 양복 맞춰서 입으시면 돼요.”

비서의 말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회장님 뜻이 그렇다니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힐튼호텔 2층에 가서 그 원단을 주고 양복을 맞춰달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 가격이었습니다. 내가 꿈꿀 수 없는 고급양복이었습니다. 평생 입어야지, 생각했는데 두 달을 채 못 넘겼습니다. 원단이 너무 보드랍고 좋아서 주머니에 카메라 렌즈를 넣으면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자꾸 찢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렌즈를 안 넣을 수 없었습니다. 바삐 사진을 찍고 이동하다 보면 주머니에 렌즈를 넣고 뛰어야 합니다. 주머니가 찢어질 때마다 호텔 양복점에 가지고 가서 수선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가니까 민망해져서 두 달 후에는 못 갔습니다. 오래 입지는 못했지만, 정 회장님의 그 마음은 오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장례를 치른 후에 정 회장님이 저를 참 편하게 대해주셨고, 그러니까 김 회장님도 한결 편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면구스러웠지만 참 감사했습니다.

한 번은 회장님이 직접 제 사진을 찍어주신 적도 있습니다. 이란 이스파한에 갔을 때 통신장관이 우리 일행에게 모스크 구경을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회장님은 예전에 봤다고 일행들만 다녀오라고 하고는 쉬고 있으려고 돌 위에 앉으셨습니다. 모스크 입구 주차장에 네모난 돌들이 놓여있었거든요. 회장님이 그러시니 통신장관도 멋쩍은 표정으로 옆에 앉았습니다. 저도 회장님이 거기 계시니 일행과 함께 구경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옆에서 조심스럽게 회장님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회장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미스터 리! 자네 사진은 한 장도 없지?”
“아, 네네.”
“카메라 줘 봐.”

저는 회장님께 카메라를 드렸습니다. 회장님이 저를 찍어주셨습니다. 그 사진이 제가 해외에서 찍힌 첫 사진입니다.

저는 회장님과 함께 찍은 사진도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회장님과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면 다 찍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습니다. 사진을 인화하고 나면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 월 며칠 어디에서 김우중 회장님과 찍은 사진을 보내드리겠다고 하고 주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 비용도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원해준 회사에게 고맙습니다. 제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회사에서 쓸데없다고 하면 못 했을 테니까요. 아마 저도 회사도 회장님의 마음을 눈치챘던 것 같습니다. 회장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본인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을 참 감사하는 분이었습니다. 회장님은 전국 대우자동차영업소의 영업사원 한 명 한 명을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과 찍은 사진을 명함에 넣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영업사원은 신뢰를 주어야 하고, 그룹 총수와 찍힌 사진이 있으면 신뢰감을 주는데 영업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며 손수 제안하시고 실행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진들을 찍었던 저는 회장님과 찍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회장님 덕분에 그런 사진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에 대하 비즈니스 센터 기공식이 있어서 방콕에서 가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전세기를 탔는데, 회장님 부부와 저만 탔습니다. 우리 전세기는 총 12명이 탈 수 있었습니다. 앞에는 비즈니스석처럼 좋은 자리가 4개 있고, 뒤에는 지하철 같은 긴 의자가 있어서 세네 사람씩 마주 앉게 되어 있습니다. 회장님 부부는 앞에 앉고 저는 뒤에 앉았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 회장님이 갑자기 제 앞에 와서 물으셨습니다.

“이문근씨! 김우중 씨하고 찍은 사진 하나도 없지?”
“아… 네.”

저는 식판을 들고 밥을 먹다 말고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정 회장님이 김 회장님을 부르셨습니다.

“김우중 씨! 이리 와 봐요.”

김 회장님이 제 옆에 앉으셨습니다. 정 회장님이 카메라를 들고 김 회장님과 저를 찍어주셨습니다.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서 눈을 감은 채로 찍혔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회장님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니까요.

회장님 생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제가 기록했던 사진은 가족사진입니다. 회장님이 병원에 계셨을 때, 정 회장님이 한복을 입은 가족사진이 없다고 찍어달라고 하셨습니다. 2019년 1월 1일이었습니다. 회장님은 병원 허락을 받고 집으로 잠시 오셨습니다.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정신은 또렷하셨습니다. 렌즈를 통해 회장님을 보는데 눈물이 나서 꾹 참았습니다. 참 뭉클하고 감동적인 기록이었습니다. 회장님의 가족사진이지만, 저는 그 사진을 가끔 꺼내서 봅니다.

정말 회장님의 기록가로, 마지막으로 기록한 것은 회장님 장례식 사진이었습니다. 기록은 내내 했지만, 조문은 새벽에 가서 따로 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회장님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회장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니, 회장님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밥은 먹고 사니?”

대우가 해체되고, 저를 만나시면 늘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미스터 리, 크렘린궁은 가봤어?”

북경에서 모스크바로 가는데 물으셨습니다. 제가 못가봤다고 대답하니까 주재원에게 얘기해서 크렘린궁이 제일 잘 보이는 호텔을 잡아주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캠핀스키 호텔 6층 객실입니다. 창틀에 앉아 크렘린궁을 바라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미스터 리, 에펠탑은 올라가 봤니?”

파리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회장님 따라서 파리를 서른 번은 족히 갔는데, 에펠탑 한 번 못 보여준 것이 미안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에펠탑이 잘 보이는 샤요 궁에 차를 세워주셨습니다.

“사진이라도 맘껏 찍고 가.”

그 따뜻한 음성들이, 회장님의 영정 사진 앞에서 툭툭 튀어 나왔습니다. 모두 다 기억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행여 밥을 못 챙겨 먹을까 봐, 본인이 회의하며 식사를 하다가도 두리번거리며 저를 찾으셨던 그 따뜻한 모습까지도 다 기억합니다. 회장님은 떠나셨지만, 저는 영원한 회장님의 기록가 ‘미스터 리’입니다. 회장님의 따뜻함은 아직 제가 찍은 사진 안에, 제 기억 안에, 제 렌즈 안에 선연히 남아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글쓴이

이문근

1959년 생
1980 신구대 사진과 졸업
1984년 대우에 입사하여 이후 내내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전속 사진담당이었다.
2000-2008 스튜디오 포이콤 대표이사, 2009-2019 로안기획 대표를 지내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아직도 넓은 세상을 사진에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