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우가족이 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언제부터 해야 할까? 세월을 아주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하는군요. 1984년이 낫겠어요. 내가 두바이 초대지사장을 할 때이지요. 아무래도 대우가 수단이나 이란 쪽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시기였고, 두바이가 경유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회장님을 비롯한 대우의 중진들을 뵐 기회가 많이 생겼지요. 노력을 해도 만나기 힘든 분들인데, 내가 두바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뵐 수 있으니 행운이었죠. 행복한 마음으로 의전을 감당했어요. 하지만 마음을 졸이는 일도 많았어요. 특히 이란으로 갈 때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이란으로 갈 때 두바이를 경유하면 꼭 비행기가 밤 12시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24시간 비자를 내줘요. 그 다음에는 오후에 이란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었죠. 그때 두바이 비자 제도가 이상해서, 내가 이민국에서 허가 사인을 받아야 해요. 소위 ‘스폰서 레터’라고 하는 건데, 이게 그 전날 내도 안 돼요. 꼭 비행기가 도착하기 10분 전에만 접수를 해 주었지요.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하면 받지를 않아요. 12시에 도착하기로 한 비행기가 12시 10분에 도착한다고 하면, 11시 50분에 받아주지는 않는 거예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죠. 비행기가 연착하는 걸 예상할 수 없으니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도 연착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 미리 가서 기다리면 돼요. 그런데 한 번, 회장님이 오셨을 때는 가능성이 없던 일이 일어났죠.
회장님이 시추장비 계약을 하려고 다른 중진들과 아부다비 공항으로 오셨어요. 혹시 불편한 일이 생길까 봐 나는 30분 전에 공항에 도착을 했어요. 그런데 비행기가 이미 30분 전에 도착을 한 거예요. 기류 때문에 빨리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없었으니 예상을 못한 거죠. 마음 같아서는 바로 공항 밖으로 나오시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의전을 담당하는 나와 우리 직원만 도착했지, 가장 필요한 스폰서가 안 왔거든요. 스폰서가 와서 스폰서 레터를 작성해주어야 하거든요. 애가 타지만 달리 도리가 없죠. 그야말로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유리창 안으로 회장님이 보이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얼마나 민망한지… 회장님과 함께 온 홍인기 사장님은 우리를 보며 큰 소리로 묻는데, 소리는 안 들려도 대충 내용은 알아듣잖아요. 무슨 말이겠어요. 왜 나갈 수 없냐는 거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할 뿐,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죠. 정말 30분을 기다리는데, 30분이 3개월 같더라고요. 시간이 어찌나 느리게 가는지… 그래도 결국 시간은 가고, 스폰서가 왔어요. 뭐라고 할 수 없죠. 그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딱 맞춰서 온 거니까요. 그래서 빨리 좀 부탁한다고만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또 삐딱하게 나오는 거예요. “대우그룹 회장이다”했더니, 대우그룹 회장인 거를 뭘로 증명하냐고 시비를 걸더군요. 그래서 다시 잘 부탁하고, 허가가 나서 회장님과 홍인기 사장님을 모시고 나왔어요. 그런데 또 또 문제가 생긴 거예요.
회장님은 계약을 바로 내일 하자고 하시는데, 상대측에서 계약을 내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찌나 심장이 뛰는지…
“계약은 어떻게 됐냐?”
회장님의 질문에 마음 졸이며 대답했죠.
“내일 할 줄 알았는데 아직은 미정입니다.”
나는 회장님이 화를 버럭 내실 줄 알았어요.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회장님은 달랐어요. 대답을 듣고, 참 대단한 분이구나 느꼈죠.
“중동 다 그렇지 말이야. 걱정하지 말아라. 안 하면 나중에 하면 되지, 하긴 하는 거니까.”
참, 그 상황에 어떻게 화를 안 내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지… 아주 차분한 어조로 그 한마디를 하시는데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참 관대하셨어요. 열심히 안 하면 모를까, 열심히 하다가 실수를 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셨어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장형 같다고 할까? 요즘에는 장형이라는 말을 잘 안 쓰죠? 그런데 나는 ‘큰형’보다는 ‘장형’이라고 하고 싶어요. 회장님은 딱 내가 생각하는 ‘장형’같은 분이셨거든요. 잘못한 것을 야단칠 때는 호되게 하지만, 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가 주셨어요. 생각지도 않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챙겨주시면서 참 격이 없고 편하면서 따뜻한 분이었지요. 일할 때는 카리스마가 있으셨지만, 개인적으로 따뜻하고 편하게 대해주실 때는 또 한없이 그러신 분이 회장님이셨거든요.
두바이에 있었을 때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볼까요? 두바이는 낮 한 시부터 네 시까지는 모든 게 다 휴무가 돼요. 그 시간이면 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없죠. 호텔의 양식당 같은 데는 열지만 나머지는 다 문을 닫으니까요. 일을 처리하다 보면 12시에 딱 밥을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시간을 보면 1시가 넘을 때가 종종 있었어요. 회장님하고 같이 일을 할 때는 발을 동동 굴렀죠. 저야 한 끼 건너 뛰더라도 회장님은 점심을 드시게 해야 하니까요.
어느 날, 또 1시가 넘어서 난처해하고 있었어요. 회장님이 대뜸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집에 가서 점심을 먹어도 된다고. 제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한 말씀이었죠. 누추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다른 대안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집으로 모시고 가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뚱맞은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빗 좀 있냐?”
“아니, 저희 집으로 가시는데 뭐 하려고 빗으려고 하십니까?”
“야, 네 와이프 오래간만에 보는데, 아무렇게나 하고 가냐?”
그 말이 난 왜 그렇게 감동이었는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 회장님의 말이나 행동에는 따뜻함이 한껏 묻어나올 때가 많아요. 일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 장형처럼 개인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는 분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나중에는 폴란드에 갔는데, 폴란드에 있었을 때도 따뜻함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폴란드에서는 자동차 타고 같이 다닐 때가 많았는데, 얼마나 편안하게 대해 주시는지 몰라요. 같이 다닐 때는 업무 얘기 잠깐 하고 그저 친구 같고 형제 같은 대화라고 해야 할까, 일상적인 편한 대화를 많이 나누거든요. 어디 가서 밥을 먹었는데 거기가 참 맛있더라. 밥은 맛있어야 하는데, 거기는 꼭 또 가고 싶더라. 이런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냥 대화만 들으면 정말 편한 사람들이 나누는 것 같은 그런 대화를, 회장님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행운이었지요.
한번은 우크라이나를 모시고 갔어요. 폴란드에서 한국을 가시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나라로 출장을 가시면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가자.” 하셨거든요. 겨울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러시아 음식이 국도 밍밍하고 뜨겁지도 않고, 기름기도 둥둥 뜨거든요. 겨울에는 더 먹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그쪽에 가면 매번 끼니가 걱정이죠. 그때도 그랬는데, 회장님과 둘이서 걸어 가다 보니까 길가에서 목판 위에 고등어 몇 마리를 놓고 팔더라고요.
“회장님, 저것 좀 사다가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을까요?”
회장님은 씩 웃기만 하셨어요. 똑같은 맘이죠, 뭐. 그 밍밍한 국보다는 나을 거라는 마음이요. 그래서 고등어를 사와서 러시아 지사에서 출장 온 친구에게 물었어요.
“이걸로 매운탕이나 찌개를 끓이면 좋겠는데, 잘 끓이냐?”
“네, 자신 있습니다!”
대답이 하도 우렁차길래 믿었죠. 하지만 그 믿음은 배신을 당했어요. 영 먹기 힘든 맛이더군요. 회장님도 그러셨겠죠. 그런데 그냥 “맛이 참…” 하면서 웃으시고, 그대로 드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따뜻해졌던 걸 보면, 그 친구도 그 따뜻함을 똑같이 느꼈을 거예요.
그래도 일을 하실 때는 정말 프로였죠. 강단 있는 협상의 귀재랄까. 92년도인가, 93년도인가. 카자흐스탄 대통령 한번 만나러 간 적 있어요. 11시쯤 대통령하고 약속이 돼서 들어갔는데 여러 가지 얘기들 하시는데, 본인이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내가 지금 밖에 나가서 볼 일이 있으니까 이따 2시쯤 다시 만나죠.”
나는 옆에서 듣는데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대통령한테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대통령도 어이가 없었던 건지,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어요. 그리고 회장님은 밖으로 나와서 나에게 묻더군요.
“야, 너, 점심 한 끼 안 먹어도 되지?”
“안 먹어도 되지요.”
“그럼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 몇 가지를 편지로 써라. 나중에 2시까지 갈 때 그걸 들고 가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급하게 받아 적은 내용으로 편지를 썼어요. 도대체 그런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했죠. 그리고 회장님은 2시에 그 편지를 가지고 들어가셔서 다시 협상을 하셨죠.
폴란드에서 대통령을 만날 때도 여전히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셨어요.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뜸 비서실장에게 “우리 이야기 나누는 것 좀 사진 찍을 수 없냐?”고 물으시더군요. 그 사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드셨던 거죠. 비서실장이 당황하니까 “이런 거 너희들은 사진도 안 찍니?”라고 다시 물으셨죠. 아마 “사진 좀 찍어주세요.” 했으면 안 된다고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너무 강단 있게 말하니까, 갑자기 비서실장이 전속 사진사를 불러오더군요.
정말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사업가, 프로, 전문가… 뭐 이런 수식어들을 다 붙여도 회장님 한 사람을 표현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저 ‘장형’이었어요. 대우 가족이라는 말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그저 수식어로 들릴지 몰라도, 대우 안의 사람들은 정말 가족이었다는 걸 우리는 알거든요. 내가 ‘장형’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어떻게 기업 총수가 장형 같을 수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잘못한 건 따끔하게 혼내고, 잘한 건 칭찬하고 믿어주며, 사람을 따뜻하게 챙기며 감동을 주는… 그런 장형이었어요, 회장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