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
대우건설 | 경남기업
경공업 위주의 상품수출을 통해 비약적 신장을 이룩해온 대우는 1972년 수출 2위 달성, 금탑 산업훈장 수상을 고비로 1973년부터 경영다각화를 시작했는데, 오늘날 한국 건설업계의 핵심이 되고 있는 (주)대우 건설부문이 태동한 것도 이때였다.
우리나라의 건설업은 6.25전쟁의 복구사업에 힘입은 바 크다. 전쟁 후의 복구사업을 하면서 건설은 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계획 수행으로 기간산업 구축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따른 건설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급성장해 왔다. 특히 대우가 사세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던 1973년 중반에는 대내외적으로 건설에 대한 수요가 크게 일고 있었다.
대우가 건설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덧붙여 해외활동을 통한 경험이 건설의 참여에 기여했다. 대우는 해외건설수요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동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당시의 해외건설 붐은 국내 건설업계를 술렁이게 할만큼 대단한 열기였으며, 해외지향을 모토로 기업활동을 수행해온 대우 역시 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이에 대우는 건설업 진출을 위한 계획수립에 착수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는 650여개의 건설회사가 난립되어 덤핑입찰이 성행하는 등 건설업계의 질서가 문란했으므로 정부는 건설업계에 대한 신규참여를 불허하고 있었다. 대우가 신규로 건설업에 참여하려면 기존 건설회사의 면허를 취득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대우는 1973년 7월 3일, 당시 도급순위 604위였던 영세 건설업체 영진토건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동년 8월 1일 상호를 대우건설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대우 건설부문은 해외건설을 주력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국내의 여타 건설업체들처럼 중동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대우는 신시장을 개척하고 넓혀감으로써 그 성과를 드높여 왔다.
그리고 무역부문의 상품수출과 병행하여 수행된 건설수출은 경영의 효율과 세일즈 기법에 있어서도 타업체와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우건설
경공업 위주의 상품수출을 통해 비약적 신장을 이룩해온 대우는 1972년 수출 2위 달성, 금탑 산업훈장 수상을 고비로 1973년부터 경영다각화를 시작했는데, 오늘날 한국 건설업계의 핵심이 되고 있는 (주)대우 건설부문이 태동한 것도 이때였다. 우리나라의 건설업은 6.25전쟁의 복구사업에 힘입은 바 크다. 전쟁 후의 복구사업을 하면서 건설은 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계획 수행으로 기간산업 구축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따른 건설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급성장해 왔다. 특히 대우가 사세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던 1973년 중반에는 대내외적으로 건설에 대한 수요가 크게 일고 있었다. 대우가 건설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덧붙여 해외활동을 통한 경험이 건설의 참여에 기여했다. 대우는 해외건설수요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중동을...
1974년 8월 24일, 자본금 6,000만원의 대우건설은 자본금 10억원의 대우개발을 흡수 합병하고 이어 12월 20일에는 33억원을 유상증자, 납입자본금 43억 6000만원의 대형 건설회사로 발돋움했다. 이로써 토목건축업 도급순위는 전년도 604위에서 단숨에 21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대우건설은 1974년 11월 1일자로 상호를 대우개발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대우기계 창원공장, 대우실업 비봉공장, 고려피혁 영등포공장 등 대우 자체 공사와 화신전기 부평공장 신축공사, 동양화학의 염용해공장․발전소․희로소공장 등 국내시설 공사를 활발히 수행하여, 그해 매출 6억 2,400만원을 기록했다. 대우건설은 1975년 들어 대우센터 신축공사 착공을 준비하는 한편 1월 12일에는 본사 사무실을 대우센터 신축현장으로 이전하고, 2월 6일 국내 최대의 오피스빌딩이 될 대우센터빌딩 신축 기공식을 거행했다. 아울러 영업활동에도 박차를 가해 대우실업 부산공장 증축공사, 대우전자 주안공장 증축공사, 신성통상 양주...
대우가 건설사업에 있어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또 국내 유수의 건설업체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이룬 것은 울산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이 공사는 일괄도급 방식에 의한 발전소 건설로 대우가 한국전력을 대신하여 설계, 기자재공급, 건설품질관리, 시공감리, 시운전 등 울산화력발전소 4, 5, 6호기 120만킬로와트를 완전히 건설하고 시험운전까지 거친 후 한국전력에 양도하는 공사였다. 대우는 이 공사를 위해 설계를 담당한 대우엔지니어링, 국산화 기자재 공급을 맡은 대우중공업, 건설시공을 맡은 대우개발, 자재와 관리를 맡은 대우실업의 정예인원 300명을 선발하여 발전소 건설본부를 조직했다. 이어 5월에는 부지정리 공사를 착공하고 1977년이 저물어 가던 12월 16일 울산 현지에서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했다. 마침내 대우는 선진 외국에서도 1기 건설에 5~7년이 걸린다는 10만킬로와트급 화력발전소 3기를 순전히 대우...
해외시장 개척의 선두주자였던 대우는 건설에 있어서도 두드러진 시장개척의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해외건설업에 늦게 참여한 대우는 국내업체간의 과당경쟁을 피하고 신규시장을 겨냥하여 건설수출을 수행했다. 중동건설붐이 한창일 무렵 대우는 사우디, 쿠웨이트 등 기존 국내업체들이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을 피해 해외진출의 첫 공사를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서 수주했다. 이 공사는 1,800만 달러 규모의 퀴토시 도로포장공사였는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대우의 첫 해외진출 건설공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 국내 업체로는 최초로 남미에 진출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대우의 두 번째 시장개척은 북아프리카 수단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수단은 외국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소련, 중공 등 공산국가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한은 수단의 수도 카툼에...
리비아는 대우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갖는 곳이다. 과거 대우의 건설수출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현재도 가장 큰 해외건설시장 중의 하나로 대우의 건설사업을 떠받치는 지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비아는 대우가 진출할 당시 북한 공관이 설치되어 있던 미수교국이었다. 특히 동구권 국가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석유부국으로 가다피 집권이래 경제개발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었다. 기술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리비아는 이러한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제반 건설사업을 해외기업 유치를 통해 해결하는 중이었고, 대우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적응하기 힘든 자연환경을 무릅쓰고 리비아 건설시장에 본격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진출은 중동에 편중되어 있어 신시장 개척이 절실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우의 리비아 진출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1978년 2월, 대우개발주식회사는 리비아 정부로부터...
1977년 6월의 대우센터빌딩 준공을 계기로 국내건설부문에도 적극 진출한 대우는 같은해 경부복복선 영등포-수원간 노반공사,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 광화문 사옥건설공사, 한국종합전시장 건설공사, 충북은행 본점 신축공사를 수주하고 건설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뉴설악호텔 건설공사, 부산-마산간 고속도로 제3구간 공사, 서울힐튼호텔 건설공사, 동작대교 건설공사, 대우조선공업 옥포조선소 건설공사, 새한자동차 공장증축 공사, 대전공작창 건설공사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와서는 서울 남부화물기지 시설공사, 남강유역개발 2-3공구 공사, 대우조선 옥포 사원아파트 3,200세대 건설공사를 착공하고, 1980년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일부공사, 제철화학 카본블랙공장 건설공사, 대우아이티티공장 건설공사, 서울 개포단지 대지조성공사, 연세대 영동병원 건축공사, 서울 봉래빌딩 건설공사, 옥포대우병원 신축공사에 나섰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대우 건설부문은 1977-81년까지의 5년동안 놀라운 성장을 계속했다. 1977년 231억원의 매출액이 1979년에는 1,597억원, 1981년에는 5,307억원에 이르게 되어 연평균...
경남기업
경남기업은 1951년 8월 29일 대구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경남토건(주)로 창립, 건설업면허 제2호를 취득한 경남기업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1952년 11월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고 1954년 5월에 상호를 경남기업(주)로 변경했다. 1965년 11월 15일 태국 중앙방송국 타워공사를 수주함으로써 국내건설업계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경남기업은 이를 교두보로 1967년 7월 베트남 진출, 1971년 5월...
그러나 1974년 이래 중동건설 특수로 급속한 사세의 신장을 이루어온 경남기업은 1984년 들어 중동경기 퇴조와 채산성 악화가 겹쳐 한국외환은행과 자금관리 계약을 체결하고 기업 정리작업에 착수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규수주가 전면 금지된 상태에서 외환은행 자금관리하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남기업은 1984년 11월 26일 대우가 대주주지분 26.8%를 인수하고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재건의...
대우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경영내실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경남기업은 책임경영, 기술개발, 품질관리, 그리고 협력업체 지원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89년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전남지역 등 전국에 경남아파트단지를 조성하고 지하철, 택지조성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7년여에 걸친 “품질경영”으로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한 경남기업은 1992년을 새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