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역
대우실업 | (주)대우
L/C No.44055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종이 한 장
대우실업의 첫 수출을 열었던 신용장 L/C NO.44055는 방콕의 시아 후아트(Sia Huat L.P.)사로부터 받은 2만 야드의 트리코트지의 주문이었다. 그 가격은 5,676달러였다. 1967년 4월 28일이었다.
대우는 오늘날 큰집(大宇)이라고도 불리우고 혹은 대우주(Great Universe)라고도 불리우게 됐지만, 막상 작명은 단순명료하게 채택되었다. 그것은 동업자 도재환이 운영하던 대도직물의 ‘대’ 자와 김우중의 ‘우’ 자를 따 창업주 김우중이 자연스럽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대우가 포춘지에 오르내리는 기업이 되고 급신장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이 부풀어 있을 때 창업주 김우중은 작명에 대해 이렇게 밝힌적이 있다.
「….대우실업이라는 이름은 대도직물의 ‘대’ 자와 내 이름 자의 ‘우’ 자를 합쳐 내가 지은 것이며 작명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간에서는 이름을 한자로 풀어보고 ‘큰집’ 이라느니 영어로 풀어 ‘대우주’이니 하며 별별 의미를 찾으려는 듯 한데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 이렇게 큰 그룹으로 발전할 것까지 생각하고 시작했겠습니까? 다만 ‘대우’ 다음에 ‘실업’을 붙인 것은 내가 한성 시절부터 ‘실업’이라는 이름에 친숙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물산이니 양행이니 산업이니 하는 이름들도 없진 않았지만…..」
창업주 김우중 회장의 이 솔직한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대우실업은 창업하여 줄곧 현실에 열중하고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열심히 하다가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는 말처럼 진솔한 대답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30년이 된 오늘 대우는 ‘큰집’ 이며 ‘대우주’(Great Universe)다. 그걸 의심하는 대우가족은 없다.
대우의 성장이력을 정리하다 보면 인수합병(引受合倂)이라는 단어가 무척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그 인수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인수당한 회사가 모두 대우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인수당하기를 희망해 왔다는 점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인수 때마다 대우의 비약적인 사세(社勢)의 확장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대우실업은 제2공장의 화재 이후 제 5공장을 전문성을 살린 일관생산 체계의 대단위 섬유공장화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나머지 4개 공장에 산적해 있던 편직 및 가공시설을 1973년 9월부터 4개월에 걸쳐 제5공장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 4월 18일, 제5공장 확장공사가 2차 준공됨에 따라 일본 도레이(Toray)사로부터 도입한 와인더기 45대, 스트레치기 12대의 신규 설치에 착수하여 3개월만인 7월 28일에 설치...
섬유류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제품 수출은 사실상 오늘의 대우를 있게한 산실이자 아직도 대우의 중요한 사업이다. 따라서 대우는 경영의 다각화를 통한 수출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하는 한편, 경공업제품 수출의 지속적인 신장에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1978년 4월 13일 대우는 봉제품 수출업체인 원림산업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대우는 인수기업의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원림산업을 대우실업의 임가공공장 형태로 운영키로 하고 생산본부를 수출본부로 흡수토록 하는등 원림산업의 기구를 대폭 축소 개편하였다. 또한 공장을 재편성 했으며 일부 공장을 매각, 경영 합리화를 이룩해 나갔다. 그 결과 원림산업은 대우가 인수한 다음해에 적자기업에서 흑자기업으로 전환됐다. 또한 수출은 1979년 그해 전년대비 32.5%가 신장된 1억 1,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편 1980년 1월에는 대우의 외의류 생산 일원화 방침에 따라 대원섬유와 신원섬유를...
창업이래 섬유수출로 성장해 온 대우는 1972년부터 종합상사를 지향하면서 비섬유부문으로의 진출을 모색, 개발부를 설치했다. 수출품 개발이 주목적이었지만 신규투자 활동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투자활동의 하나로 대우는 1972년 9월 1일, 피혁제품 제조업체인 고려피혁공업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대우는 고려피혁 인수 후 곧바로 낙후된 기계시설을 대체, 보완하고 품질향상과 생산량 증대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 9월에는 대졸 기술사원을 대거 생산라인에 투입함으로서 생산과 업무활성화를 기한데 이어 연말에는 대우실업 개발부에서 담당하던 피혁 로컬 판매업무를 고려피혁으로 이관, 고려피혁으로 하여금 영업활동을 전개하게 했다. 고려피혁은 대우의 생산기술과 제품개발 노력에 힘입어 1974년 초부터 하루 600매의 원피를 안정적으로 생산케 되었고 판매와 관리도 정상화 되었다. 한편 혁화제품 생산계획에 따라 대우실업 부산 제3공장을 임차하여 제화공장...
대우의 섬유수출은 창업한지 8년밖에 안된 대우가 1975년 종합상사 지정을 받은 해를 전후하여 하나의 계기를 맞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양적인 팽창에서 질적성장으로 방향전환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먼저 제품의 품질관리를 강화하여 전반적인 품질 수준을 끌어올렸다. 품질관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73년 품질관리위원회가 편성되면서부터였다. 품질관리를 시작한 것은 당시 시어즈 로벅의 철두철미한 검사 시스템에 적응키 위한 것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우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룹내 섬유관련 계열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본사의 강력한 통제와 품질관리가 이루어져, 제품의 질적향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덕에 점차 수입상과의 거래에서 체인스토어 바이어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덧붙여 1975년 10월, 자체 스타일실과 디자인실을 설치하고 전문가를 영입했다. 이는 수시로 세계 패션 현장을 방문하여 살아있는...
1981년 7월 22일, 대우개발과 종합상사 대우실업은 각각 이사회를 열어 대우개발과 대우실업을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증권감독원에 통보, 공시함으로써 한 회사로 통합했다. 이어 9월 16일에는 합병 승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가 열렸으며 합병일은 1981년 11월 18일로 결정되었다. 합병된 새 회사의 이름은 ‘주식회사 대우’였다. 오늘날의 종합상사 주식회사 대우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에따라 합병후의 자본금은 대우실업 자본금 408억원과 대우개발의 275억원이 합쳐진 683억원으로 대형화 되었다. 합병은 대우개발이 대우실업을 흡수 통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주식회사대우의 무역부문은 이때부터 해외신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중동지역과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동구지역에 지사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980년 수단타이어공장의 준공과 함께 해외투자자회사의 설립을 개시했다. 이어 1985년 인도네시아에 므수프탈산공장을 설립했고, 86년 벨기에 앤트워프 정유공장을 설립했다. 한편으로는 북방교류에...
대우무역부문은 기존의 상사기능 위주의 사업구도를 탈피하고 취약한 내수사업 기반을 다지기 위해 사업의 다각화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 VCR판촉용 비디오 테이프 공급을 개시하면서 영상미디어사업을 시작했다. 영상미디어사업은 정보화 및 다채널, 다매체화가 진전됨에 따라 영상 소프트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될 전망이며 이로 인해 중요한 경영자원으로 부상된 영상 소프트를 사전에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도 진작부터 진출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약한 한국 영상산업 육성과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영상 소프트의 수출을 산업화 하기 위해 창업부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대우에게 적합한 사업의 일종이었다. 대우는 이 사업의 진출로 업계 선두지위를 확보했다. 1996년 홈비디오 시장점유율이 1위(40%)였으며, 채널 22번의 대우시네마 네트워크(DCN)의 케이블TV 시청율에서도 1위(시청 점유율 20% 내외)를 차지했다. 또 영화 제작실적 및 흥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