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1 1967년의 경제환경
1967년에 들어오면서 정부는 수출신장이란 지상과제와 무역자유화라는 개방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심도있게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출정책 입안, 각종 수출 지원제도 시행과 장단기 목표를 세우는 작업이
1967년에 들어오면서 정부는 수출신장이란 지상과제와 무역자유화라는 개방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심도있게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출정책 입안, 각종 수출 지원제도 시행과 장단기 목표를 세우는 작업이
이런 국내외 상황 속에서 대우실업주식회사(大宇實業株式會社)의 창업이 준동(蠢動)되고 있었다. 창업주는 30세의 약관 김우중(金宇中)이었다. 창업주 김우중은 1959년 9월,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4학년 무렵부터 부흥부 자문기관이었던 경제개발위원회에서 아르바이트로
대우는 오늘날 큰집(大宇)이라고도 불리우고 혹은 대우주(Great Universe)라고도 불리우게 됐지만, 막상 작명은 단순명료하게 채택되었다. 그것은 동업자 도재환이 운영하던 대도직물의 ‘대’ 자와 김우중의 ‘우’ 자를 따 창업주
대우실업의 최초의 오더는 방콕의 시아 후아트(Sia Huat L.P.)사로부터 받은 2만 야드의 트리코트(L/C NO.44055) 지였다. 그 가격은 5,676달러였다. 대우실업은 이 오더를 뚝섬에 있는 동업자 명의의 대도섬유공업사에서
일감이 늘어나자 대우실업은 대도섬유공업사만으로 수출 물량을 대기가 벅찼다. 결국 수출을 하려면 공장이 있어야 했고, 그 공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 방법은 하청을 늘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동남아의 트리코트 수출이 계속 급증하면서 대우실업의 사세(社勢)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8년 대우실업의 수출액은 291만 달러였다. 그러나 1969년에는 365만 달러를 기록해 명실공히 트리코트 수출왕으로서의 저력을 당당히
1972년 대우실업은 수출수요에 대응하고자 섬유공장의 확충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1972년 8월 4일, 남양산업사로부터 2개의 공장을 인수함으로써 기존의 3개 공장과 함께 모두 5개의 섬유공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대우실업이 초기 수출의 주력시장으로 삼았던 동남아는 1968년 여름이 되자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한국 등지로부터
대우가 미국시장 조사를 끝내고 내린 결론은 기존의 트리코트 원단만 가지고는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급 원단의 개발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대우는
대우는 1970년 7월부터 자체공장 12개 생산라인의 가동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제품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제품은 주로 값싼 트리코트 셔츠가 주종이었다. 소재는 폴리에스터를 섞어 짠 것이 많았는데,
대우실업은 창업 이후 매년 높은 수출신장을 거듭하여 1972년 11월 30일 제9회 수출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의 영예를 안았다. 영예를 안음과 동시에 대우실업은 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우실업의
창업 9년만에 쌓아올린 3억달러의 금자탑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13년 전 한국의 총 수출실적은 고작 1억달러였었다. 그런데 9년만에 대우실업이 그 세배에 달하는 3억달러의 수출탑을 쌓은 것이다.
대우실업은 명실상부한 민족기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1973년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기업은 경제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전 근대적 경영방식에 집착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과 정부로부터
1972년 10월 17일, 정부는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비상적인 체제개혁을 시도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으며 비상국무회의로
1972년, 수출실적 2위를 기록한 대우의 이력은 창업 5년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5년동안 대우는 착실히 성장기반을 구축하였고, 그동안의 수출활동에서 축적된 자금력으로 1973년부터 본격적인 경영다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우실업의 출생지인 자그마한 공간, 동남도서(東南圖書)빌딩은 도시계획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당시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대우의 생가(生家)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 도서빌딩에서 대우실업은 신장되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의 공업화는 1960년대의 섬유제품, 잡화류 등의 단순노동 상황에서 크게 진척을 보이게 되었다. 중화학공업화는 경공업에 비해 월등한 규모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우리 수출산업인과 3백만 종업원은 정부의 지도와 온 국민의 성원 밑에 수출증대를 통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민족대업을 성취하는 데 헌신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서 합니다. 하나.
창업 이래, 국민에게는 최대의 양심기업, 국가에는 최고의 납세자, 주주에게는 최대의 재산관리자, 종업원에게는 최적의 일터, 고객에게는 최선의 상품의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으로서의 정착을 위해 경영과 자본의
대우의 해외건설 진출은 여타의 경쟁사에 비해 늦은 감이 없지않았다. 그렇다고 해외건설 진출을 위한 정보나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훗날의 자체평가지만 오히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80년대 경제환경과 구조조정 정책 1981년 제5공화국은 탄생과 함께 고도성장을 지속시키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경제안정시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1980년에 42.3 %였던 도매물가 상승율이 1981년에는 11.3 %로,
대우실업과 대우개발의 합병에 따른 그룹의 면모 일신과 함께 1982년 대우는 제2의 도약을 위한 일대 정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제2창업을 기치로 내세우고 이러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제2창업
대우의 30년이 모두 밝고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회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불화를 대우 역시 만났다. 이 불화는 1985년 대우자동차 노사분규와 87년 대우조선노사분규라는
또 하나 대우가족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대우조선 노사분규는 1987년에 있었다. 87년의 국내경제는 수출 및 설비투자의 호조세가 지속됨에 따라 국민총생산은 12.2%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대외부채잔액이
대우가 창업되던 무렵, 우리 정부가 해외지향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갇혀있던 존재로만 인식되던 한국의 위치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전기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되기에
1990년 3월 22일 대우는 서울힐튼호텔에서 창업주 김우중회장을 비롯한 2천여명의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23주년 기념식을 갖고 달성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 대우는 제2창업의 뜨거운 의지와 함께
관리혁명의 추진 기본배경은, 1989년말 경쟁력 저하에 대한 대오각성하에 무엇보다도 관리주체의 의식개혁을 통하여 경영 전부문의 개혁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원년인 1990년도는 개혁의 기반조성을 위한 의식개혁의 해로 정하고,
관리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기본질서 확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또 당연히 지켜져야할 시간지키기, 낭비배제, 정리․정돈, 청소 등 기본질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 무엇보다 질적인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진영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소련은 다 알다시피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었다. 이렇게 되자 유럽 석양론(夕陽論)까지
1990년대에 들어 대우는 기술보호주의의 대두로 인해 세계 최고의 독창적 기술 확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세계경영의 질을 높이고 내부 지원축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기술대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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