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woo

Shipbuilding & Marine Engineering

조선 해양

조선

대우에서는 당시 어려운 여건과 조선불황에 따른 장래 사업성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적극 호응하고, 선박류를 비롯한 중공업 제품 수출 강화를 위하여 창업주 김우중 당시 대우실업 사장의 과감한 결단력으로 옥포조선소 건설사업을 결정하였다.
옥포조선소 건설현장을 인수하기로 합의한 후 대우에서는 이의 인수를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옥포조선소의 건설과 향후 조선산업을 영위할 법인체 설립을 서둘러 1978년 9월 26일 자본금 1천만원으로 『대우조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새로 설립된 대우조선은 정부 및 대한조선공사와 인수인계 작업을 계속하여 옥포조선소를 정부측의 한국산업은행과 대우의 공동출자로 설립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또한 조선소를 신조선, 수리조선, 플랜트 및 산업기계를 복합생산하는 종합기계공업단지로 육성키로 정부와 대우그룹이 공동 합의한 후 폐허상태에 있던 옥포조선소 건설현장을 1978년 10월에 인수하고 건설사업을 재개하게 되었다.
인수팀은 구 아주국민학교(현 서문 연수관 위치) 교실을 빌려 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인수작업을 펼침과 동시에 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1월 6일 열린 제 45차 경제장관협의회에서는 대우조선의 종합기계공단 건설을 위한 지원 방안을 의결, 옥포조선소 건설사업이 국가적인 사업임을 확인했다.
창립시 188명이던 종업원이 연말엔 251명으로 늘어났으며, 자본금도 연말까지 (주)대우 93억원, 대우중공업 37억원, 한국산업은행 124억원을 출자하여 총 254억원으로 늘어났다.

대우조선해양

이문근

바다 40만평을 매립하고 육지 80만평을 정지하여 총 120만평의 대단위 조선소 부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광활한 갯벌 120만평을 개척하는 대단위 토목공사와 건설공사로 수많은 불도저와 덤프트럭의 굉음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직원들은 모두 작업복 상의 왼쪽가슴에 ‘나는 옥포건설의 기수다’라는 글을 새겨 붙이고 개척자의 꿈을 키웠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거북선으로 왜선 40여척을 격침시킨 유서깊은 옥포만의 지도는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한국의 기수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하나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골리앗 크레인 설치

이문근

‘옥포조선소 도약의 해’였던 1981년. 연초 조직개편(4본부 8실 53부 7담당 1소 4공장 1조립장 1사무소 1출장소 3지사)을 시작으로, 조선소 건설 마무리 공사에 고삐를 당겨, 4월에는 100만톤급 제1도크를 완공한데 이어, 9월에는 900톤 골리아스 크레인 설치를 완료함으로써 옥포조선소 건설의 대역사를 끝낸 해였다.
10월 17일에는 내외귀빈 8백여명 및 전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망의 종합준공식을 갖고 세계시장 및 해운업계에 옥포조선소의 가동과 출범을 알렸다. 또 이날 조선소 건설공사와 병행하면서 건조한 노르웨이 WESTFAL-LARSEN사로부터 수주하여 첫 건조한 화학제품 운반선 2001호선(BOW PIONEER)와 2002호선(AUSTANGER)의 명명식도 같이 거행됐다.
다목적 옥포조선소의 완공으로 우리나라 조선능력은 단숨에 280만톤 세계 10위에서 4백만톤 세계 5위의 조선국으로 급부상했다.

노사분규와 김우중 회장의 옥포 조선소 상주

이문근

창업주 김우중 회장이 옥포에 상주하면서 전사원들과 대화를 계속해 나갔고, 수많은 직원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희망을 주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하여 후생복지, 안전, 건강에 관한 사항 뿐만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개선점과 문제점에 관해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더하여 훌륭한 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끊임없이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업이 산업합리화업체로 지정되었고, 그룹사 자구노력 등을 골간으로 하는 정부의 정상화방안이 마련되어 시련을 극복할 발판이 마련되어갔다.

이문근